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이허 (문단 편집) === 민족운동 === 1929년 9월 20일, 고이허는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에 참석했다. 이 대회에선 조선혁명군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속하게 했고 중앙집행위원을 23명에서 15명으로 줄이기로 결의했다. 이때 고이허는 [[현익철]], 이진탁, [[심용준]] 등과 함께 집행위원 15명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7일에 열린 국민부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외무부 집행위원 겸 중앙검리부 검리 및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이후 고이허는 1929년 11월 4일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일명 남만청총) 중앙간부가 되었고, 같은 달 18일에 열린 남만청총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고이허는 곧 남만청총이 국민부를 공산당에 잠식시킬 것을 우려해 대회를 중단시키고 가장 강경한 공산주의적 발언을 한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로 인해 [[김일성]]과 차광수 등 공산계 인사들이 국민부를 이탈했다. 1929년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조선혁명당으로 개편되었다.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이 조선혁명당 위원장을 겸임했고, 고이허 역시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고이허는 국민부 헌장 입안에 적극 참여했고, 1930년에는 국민부 교양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1932년 1월 18일 국민부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의 주요 간부들이 신빈현 하북에 있는 서세명의 집에 모여 중앙간부회의를 열었다가 일본 경찰과 중국 경찰이 급습하는 바람에 관계자 80여 명이 검거되고 말았다. 고이허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체포를 모면한 인사들을 모아서 조선혁명당을 재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때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는 [[양세봉]], 국민부 집행위원장으로는 김동산,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는 김학규, 재정부장으로는 이상관, 외교부 및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홍심원 등이 선출되었다. 그가 기초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혁명당의 당의는 다음과 같다. >혁명적 수단으로써 원수 일본 침략세력을 박멸하고 4천년을 독립하여 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며,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국민 전체 생활의 평등을 확보하며, 나아가 세계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 또한 고이허가 제정하거나 수정한 조선혁명당의 주요 당강은 다음과 같다. >원수(仇敵) 일본 침탈세력을 박멸하고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완성함,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세력을 숙정함으로써 민주집권제의 정권을 수립함,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를 삭멸(削滅)하고 국민생활의 일군을 단위로 하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함, 국민은 일체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짐, 토지는 국유로 하고 농민에 분급함, 대규모 생산기관과 독점적 기업은 국영으로 함. 고이허는 조선혁명의 진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노동자·농민·도시직업자·지식자 등 혁명의 전위분자를 강고히 단결시켜 조선혁명의 중심세력을 확립하고, 전체대중을 이 중심세력에 긴급히 영도·연결시킴과 동시에 전세계 피압박민족 및 무산계급의 혁명전선과 굳게 결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박멸함과 함께, 내부의 일체 압박 및 착취세력을 파괴하고 조선의 절대독립을 완성하여 노농(勞農) 민주정권을 확립하며, 대기업 기관을 몰수하여 국유로 하고 대소유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나누어 주며, 모든 노동자 대중생활의 평형발달을 꾀함에 있다. 이것이 조선 피압박 대중의 유일한 살길로써 조선혁명의 전체 노정이다. 1933년, 고이허는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교민들의 자치와 조선혁명군 후원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1934년 1월에 신빈현 왕청문 남쪽 의목수에서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간부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그동안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로 펴네되었던 조선혁명군의 칭호를 원래되로 회복하고 총사령 양세봉 등 주요 간부 진용을 재편했으며,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역시 조직을 재편성했다. 1934년 11월 11일, 고이허는 일제의 '동변도 대토벌작전'으로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지자 군민대표회의를 열어 유명무실해진 국민부를 해산하고 일종의 군정부인 조선혁명군정부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군정부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고 군사부장 겸 조선혁명군 총사령엔 김활석을 선출했다. 이 무렵 조선혁명군정부는 군사위원회 산하에 10개의 군구와 4개의 특별 군구를 두었고, 3개 방면군에 300여 명의 조선혁명군 대원을 두었다. 그러나 고이허는 1935년 9월 폐결핵에 걸려 사표를 제출했고, 이에 따라 군정부의 최고 지도자는 고이허에서 김동산으로 변경되었다. 1936년 1월 17일, 조선혁명군 제2회 군민대표회는 군민대표회를 폐지하고 새로운 입법기관인 의사원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고이허는 의사원을 구성할 12명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중앙집행위원회는 폐지되었고, 대신 영도자인 총령과 각 부장으로 구성된 중앙행정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군정부·민사부·재정부·법무부·외교부·교육부를 폐지하고, 대신 총령의 지도아래 군사부(총사령부)·정치부·참모부만을 두기로 했다. 고이허는 이중 정치부장을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