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자국 (문단 편집) == 고고학으로 본 고자국 == ###이 문서에 장난성 서술을 넣는 행위는 금지됩니다. 경상도 지역의 다른 정치체들이 그렇듯 고성 지역에서 4세기대까지는 자신들만의 [[토기]] 양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시기 내산리 고분군이나 고성 주변에서 발견되는 토기들은 모두 [[안라국]]의 중심지였던 함안 양식(=범영남 양식) 토기이다. 이는 고차국 등 경남 서부의 여러 나라들이 안라국에게 칼을 겨눈 이유를 알려준다. 안라국이 이 지역 관계망에서 가장 우위에 위치해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고차국이나 사물국 등 남해안 해상교역 세력들은 모종의 불만을 품고 관계망에서 가장 우위에 있던 안라국을 공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400년]], 고구려 남정의 여파로 금관가야 세력이 급격하게 쇠퇴하는 가운데, 경상도 각지에서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토기 스타일 등이 지역 단위로 창안된다. 특히 가야지역인 낙동강 서안지역에서는 기존의 함안토기가 특징적인 기종을 더하면서 계속 발전하는 가운데, 함안 양식 토기를 모방하던 고령의 [[반파국]]과 고성의 [[고차국]] 토기 양식이 함안양식에서 분화된다. 이 고차국의 토기들은 고배류의 대각 하단에 굉장히 강한 돌대가 돌아가는 것이 특징이며, 주요 특징적인 기종은 일단다투창고배, 삼각투창고배, 수평구연호 등이다. 특히 신라토기와 비슷한 이단교호투창고배도 제작되어 전공하는 학부생들은 신라토기로 오판하곤 하는데[* 이단교호투창이라고 무조건 신라토기가 아니다.] 토기의 두께나 배신 및 대각의 형태,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각 하부에 강한 돌대가 돌아가서 조금만 토기에 대한 공부를 하면 구분하기 아주 쉽다. 그리고 고성 지역의 무덤은 분구묘로, 거대한 분구를 먼저 쌓고 매장주체부가 들어갈 자리를 다시 되파기하여 무덤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지하에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우는 경상도에서 흔히 보이는 고총과는 현격히 다른 특징이다. 이러한 분구묘는 한 분구에 여러개의 무덤들이 덧대어 축조되는 것이 특징이며, 아파트처럼 아래위로도 계속해서 누세대로도 축조된다. 이러한 형식의 무덤은 한성 백제의 중심 고분군인 서울 석촌동 고분군과 태안반도 등 서해안 지역,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라도 지역에서 흔히 관찰되는 것이다. 5세기대에 이르면 경상도 각지에서 고총이 축조되는데, 사실상 조영기술과 장례적 습속은 전라도, 충청도 지역과 관련이 있는 점에서 고차국이 해상교역집단임을 다시 상기케한다. 아무튼 이 소가야양식 토기들과 분구묘들은 5세기 전반 무서운 기세로 뻗어나가 [[진주시|진주]], [[함양군|함양]], [[산청군|산청]] 등 경남 서부 대부분이 그 세력권안으로 들어가며, 최성기대에는 [[순천시|순천]], [[남원시|남원]] 등 전라도 동부 지역, 즉 [[섬진강]] 유역에도 일정 부분 영향력을 미친 것 같다. 또 동쪽으로도 [[마산]], [[거제시|거제]] 등지에도 소가야 토기가 반출되어 그 위상을 짐작케 한다. 이 시기 소가야 토기들은 전라도에서도 발견되며, 그를 모방한 수평구연호 및 기대 등이 충청도 내륙인 연기 송원리 고분군 등지에서 발견된다. 결정적으로 서울 풍납토성 경당지구 우물 유구에 소가야토기들이 일본 스에키, 중국 도자들과 같이 출토되었다. 이 유구는 각지의 토기들을 차곡차곡 우물에 집어넣은 듯한 양태였으며, 이로 보아 모종의 의례가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차국이 백제국과도 교역한 사실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일본열도 초기 스에키 중에는 고성 소가야 양식의 것들도 있어, 소가야 공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스에키 제작 기술을 전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질토기 제조 기술은 당대 최고의 세라믹 제조기술이었고, 숙련된 공인집단과 시스템, 막대한 자원을 요한다는 점에서 이 공인들이 건너간 것은 단순히 이주로 설명할 수는 없고, 역시 고차국과 왜국간의 정치적인 행위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5세기 전반 고자국은 무서울 정도로 세력권을 넓혀나가며 백제, 왜와 교류하였다. 그렇지만 고차국의 세력권을 면밀히 뜯어보면 여러 지역에서 고차국 토기가 많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고령 반파국 토기와 경쟁하고 있으며, 동쪽에서는 안라국 토기와 같이 부장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분구묘 전통도 고성 인근과 합천 삼가 등 고성과 그 근처에서만 발견되며 나머지는 제각기이기 때문에 고차국의 세력권이라는것은 넓어도 그리 깊은 관계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차국 세력권에 뒤이어 진출하는 반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으로, 반로국은 대가야식 묘제, 대가야토기, 대가야식 장제 등이 베풀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양 세력의 격차를 알 수 있다(--괜히 대가야와 소가야가 아니다)--[* 소가야에 대해서 동외동 유적 출토 제철 유구 및 고성지역의 철제무기를 토대로, 쇠가야 였기 때문에 소가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되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야라는 표현은 4세기 가야국 중 가장 우세했던 금관국, 즉 구야국에서 온 표현이고 뒤이어 대국이 된 반로국이 가야의 정통성을 가져가면서 대가야라고 쓴것으로, 대가야 멸망 이후 신라가 그 국도를 '대가야군'으로 편제하였을 정도로 의외로 당대에 널리 쓰이던 국명이었다. 그것과 대비되어 작을 소자를 써서 소가야라는 용법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당시에도 금관국 멸망 이후 가야 세력간에 두드러지던 양 세력 규모와 강함의 대-소가 어느정도 이름에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가야의 전성시기는 이것이 끝으로, 이후에는 고령 [[반파국]]의 무시무시한 팽창속도에 순식간에 전라도 동부 지역, 경남 서부 지역의 고분군 부장품이 대가야 문물 일색이 된다. 이후 소가야는 고성 지역 인근과 진주 지역에 일정부분 세력권을 유지하게 된다. 다만 5세기 중후반부터 일본 방면 교역이 활발해져, [[대마도]]와 [[규슈]]에서 상당한 양의 소가야산 토기 및 이를 모방한 토기가 출토된다. 그리고 서쪽 진출이 반파국에 막혀서인지 대신 동쪽 [[마산]][* 합성동 고분군], 함안 칠원[* 오곡리 고분군], 김해 진례 [* 외촌리 고분군] 쪽에 일부 진출했는지 소가야 양식 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다만 소가야가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는지, 신라 양식 토기와 창녕 양식 토기도 같이 나온다. 그리고 6세기가 되면 고성 송학동 1호분에서 B호 석실이 축조되면서 왜계 고분이 등장하는 등의 특이 양상을 보인다. 이는 [[탁기탄]], [[탁국]]에 이어 금관국, 다다라, 비지(=비사벌?) 등 동쪽 신라와 인접한 가야 소국들이 잇달아 신라에 무너지면서 안라국을 중심으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왜와 교섭 활동이 벌어지는데, 그 흔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시기 가야지역에는 의령 경신리 고분, 사천 향촌리 고분 등 여러 왜계 고분이 축조되고 있어, 상당 수의 왜인들이 가야지역에 상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위기상황속에서 가야의 재건을 위해 행해졌던 [[안라회의]], [[백제]] [[성왕(백제)|성왕]]이 추진했던 [[사비회의]] 등에 대표들을 보내고 있어 고차국이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점이 되면 최후까지 소가야양식 토기가 출토되던 고분군에서도 [[신라토기]]가 출토되며, 아예 신라 석실분들이 소가야 곳곳에 축조된다. 이는 소가야의 멸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마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같이 망해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분류:삼한]][[분류:가야]][[분류:6세기 멸망]][[분류:고성군(경상남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