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정훈 (문단 편집) == 생애 == 1920년 4월 22일 [[평안남도]] 진남포부(현 [[남포시]])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도]] 소재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시인 [[백석(시인)|백석]]의 아오야마학원 후배로 백석 시인에게 월남을 권유 했지만 거절 당한다. 백석이 거절한 이유는 백석 문서 참조] [[영문과]]를 다니다가 4학년 때 중퇴했고, 북만학원(北滿學院) 대학[* 당시 [[만주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에 위치해 있었다. 1938년 하얼빈러시아교민대학(哈爾濱俄僑學院)과 성 블라디미르 전문학교가 합병되면서 창설되었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 폐교되었다. 다만 공과대학은 [[하얼빈공업대학]]에 합병되었다. 일설에 영화 배우 [[율 브리너]]가 이 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영어]], [[러시아어]], [[불어]], [[중국어]], [[일본어]]에 아주 능통했다고 한다. 그 [[백석(시인)|선배]]에 그 후배라 할 수 있다. 북만학원 대학 졸업 후인 1943년 [[중화민국]] 본토에서 [[한국광복군]]에 [[소위]]로 입대하였고 [[이진용(1920)|이진용]], 김동석 등과 함께 복무하였다. [[8.15 광복]] 직후에는 하얼빈에서 기차로 조선인들을 해방된 고국으로 실어 나르는 업무를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이 일은 보기와 달리 위험한 일이었고 이와 관련해 그의 딸 타티아나를 잃고 말았다고 한다. 귀국 후에는 평양부로 돌아와 죽은 딸의 시신을 안고 백석을 찾은 고정훈은 아무런 설명 없이 백석에게 화장장을 알아봐 줄 것을 요청하고 홀로 딸의 시신을 화장한다. 이후 이를 안 백석은 고정훈을 크게 나무랐다고 한다. 이후 한동안 백석의 소개로 조만식 선생을 만났다. 다시 조만식 선생의 주선으로 소련 공보원에 취직했다. 그는 여기서 소련군의 통역으로 활동하며 기밀 문서 등을 수집. [[조만식]]계의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이후 많은 기밀 정보를 수집하여 월남하게 된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7기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장교로 복무하였다.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특별보좌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부 장관]] 특별보좌관,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과장,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등을 지내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이었던 1950년 3월에 대한민국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그 이후에는 [[조선일보]] 논설위원, [[진보당(1956년)|진보당]] 선전간사, [[민주혁신당]] 선전국장, 구국청년당 [[총재]] 등을 지내며 혁신계 인사로 활동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대한민국 제2공화국]] 개헌을 위한 절차는 오직 국민투표로 이루어져야 하며, 현 국회는 개헌 자격이 없다고 발언하며 [[국가보안법]] 폐지, 공산당 합법화 문제, [[내각책임제]]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가 큰 논란을 빚었고,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0051100329101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5-11&officeId=00032&pageNo=1&printNo=4341&publishType=00010|#]] [* 이 당시 [[통일당]] 당수였던 [[김준연]]씨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기까지 하였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00525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5-25&officeId=00020&pageNo=1&printNo=11737&publishType=00020|#]] ] 결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신이 [[무소속]]으로 출마한 성북구 선거구에서 반강제로 사퇴하고 구속과 정치규제까지 당하며 한동안 정계를 떠나야 했다. 1963년 석방 및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1981년 [[민주사회당(대한민국)|민주사회당]]을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사회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태섭(1939)|이태섭]]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2년 [[김갑수(법조인)|김갑수]]의 [[신정당(1981년)|신정당]]과 합당하여 신정사회당이 창당되자 신정사회당 [[총재]]를 지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정사회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주 지지기반인 진보유권자들이 관제 진보정당인 신정사회당 대신 선명야당인 신한민주당을 밀어주면서 [[신한민주당]] [[김형래]] 후보와 [[민주한국당]] [[이중재(1925)|이중재]]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3년 뒤인 1988년 11월 25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폐암]]으로 별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