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제(남제) (문단 편집) === 위기를 기회로 === 원휘 4년(476년) 6월, 후폐제 유욱의 사촌 형제였던 남서주자사 건평왕 [[유경소]]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7월 초에 소도성이 난을 평정했다. 유경소의 난은 유송 충성파 모두가 참여하였다. 유욱의 폭정을 본다면 "이걸 진압하는 소도성도 미친 놈이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허나 후폐제의 성정을 보면 소도성 입장에서는 유경소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거나 방관을 했을 시 의심을 사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소도성이 이처럼 반란을 계속 평정하자, 더 교만해지고 방종해져서 사람을 함부로 살육하던 후폐제 유욱은 소도성의 명성을 꺼려 그를 죽일 생각을 했다. 후폐제 유욱은 [[나무]]로 소도성의 형상을 조각하게 하고 직접 활로 쏘았으며 좌우에게도 쏘게 하여 명중하는 자에게는 상을 내렸다. 이 사이에 소도성은 친위군의 실권을 손에 넣었다. 원희 5년(477년) 6월 한여름에 소도성이 친위군 병영에서 대낮에 웃통을 벗고 누워자고 있는데 후폐제 유욱이 들어와서 '''활로 그의 배를 쏘려고 했다.''' 소도성은 깨어나 겁을 먹고 목숨을 빌었는데 소도성의 몸이 비대하여 배가 [[올챙이]]처럼 튀어나왔으므로 과녁을 그린 다음 [[배꼽]]을 쏘려고 했다. 그러나 좌우에서 지금 쏘면 소도성이 죽어 다시 쏠 수가 없다고 말려 [[뼈]]로 만든 화살로 대신 맞혔다. 이에 소도성은 두려움에 빠져 월기 교위 왕경칙에게 황제의 측근인 양옥부, 양만년 등 15명과 약조를 맺고, 기회를 엿보며 암살을 명했다. 때마침 적절하게 [[7월 7일]] [[칠석]]날, 절에서 훔친 [[개]]를 술과 같이 먹고, 한밤중에 궁궐로 돌아온 후폐제 유욱이 양옥부에게 '''네가 해가 뜰 때까지 [[은하수]]를 건너는 [[견우]]와 [[직녀]]를 찾으면 보고하고 못찾으면 넌 죽을 것이야'''라고 으름장을 놓은 후에 잠들었다. 그런데 사실 후폐제 유욱의 으름장은 양옥부 등이 배반할 것을 짐작해서 으름장을 놓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쨌든 그가 잠들자 양옥부는 후폐제 유욱이 심혈을 다해 제작한 살인 도구를 꺼내 목을 잘라 죽인다. 후폐제 유욱은 총명해서 모자 재단하는 것을 한 번만 보면 직접 만들 수 있었고 처음 연주하는 악기도 스스로 연습하면 능히 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능낭비|이런 능력을 살인 도구 제작에 썼고]] 그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구에 일일이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을 죽일 때 쓰던 도구가 자신을 죽이는 데 사용될줄은 몰랐다. 양옥부는 자른 유욱의 목을 왕경칙에게 바쳤다. 왕경칙은 후폐제 유욱의 머리를 들고 소도성의 집에 찾아가서 후폐제 유욱을 죽였다고 알렸지만 소도성은 믿지 못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왕경칙은 소도성을 설득하지 못하고, [[연못]]에 머리를 버리고 돌아갔고, 소도성은 슬그머니 나와 연못에서 머리를 꺼내 [[혈액|피]]를 물로 씻었더니 과연 후폐제 유욱의 머리였다. 소도성은 기회를 잡기 위해 즉시 친위군을 소집하여 궁궐로 들어가 점령하고 차후의 일을 의논했다. 왕경칙은 '''"천하는 이미 소씨의 천하다. 거역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라면서 으름장을 놓고는 얼른 제위에 오르라고 했다. 하지만 소도성은 뇌차종에게 [[유학]]을 배웠기에 [[선양]]의 아름다운 방식을 잘 알고 있던 소도성은 일단 후폐제 유욱의 동생 안성왕 [[송순제|유준]]을 황제에 세우니 그가 순제였다. 소도성은 [[사공]](3공의 고위직으로 국정 중대사나 공사 등을 맡음), 녹상서사(내조의 실직으로 비서실장 급. 조조 이후 권신들은 이 직을 차지해 황제와 내부 측근의 유착을 차단한다), 표기대장군(고위 장군으로 군권 관할)이 되어 군국을 총관장하고 대권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에 원찬과 유병은 불만을 품고 12월 말에 거사를 하기로 했지만 탐지되어 먼저 원찬과 유병을 없앴다. 소도성은 [[형주]] [[자사]] 심유지가 난을 일으킬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대비했다. 심유지는 자신의 재략이 남보다 뛰어나서 딴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미리 알고 있던 소도성은 장경아를 윈휘 3년(475년) 3월에 옹주 자사로 임명하고 심유지를 경계하게 했다. 처음에는 심유지가 경계를 했으나, 장경아의 일처리가 워낙 주도면밀해서 심유지가 성심으로 대하고 그를 믿어 주었다. 윈휘 5년(477년), 심유지가 난을 일으키자 장경아는 비밀리에 건강에 있던 소도성에게 보고했다. 결국 12월에 심유지가 영성을 공격했지만 소도성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승명 2년(478년) 정월에 심유지는 화용계로 달아나 역림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