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조(당) (문단 편집) === 당 황실의 계보 === '''농서 이씨'''인 당 황실의 시조는 [[춘추전국시대]] 유명한 사상가였던 '''[[노자]]'''이며, 이후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명장이었던 [[이신(전국시대)|이신]], [[전한]]의 명장 [[이광]], [[이릉]] 등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이후 당 황실은 [[오호십육국시대|5호 16국시대]] 후기 [[서량#s-1]]의 태조 무소왕 [[이고(서량)|이고]]의 8세손이 당고조 이연이 된다고 자처했다. 다만 자신이 직접 나서 역사 왜곡을 즐겨했던 [[당태종]] 이세민의 행적이나 《[[신당서]]》등에 붙은 후세의 가탁을 따져보면 농서 이씨 족보의 모든 것이 다 맞는다고는 할 수 없다. 당나라 황실의 생물학적 혈통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는데 선비화한족설, 한화선비족설, 호한혼혈설 등이 있다. 설들의 출처는 진인각(陳寅恪), 장경(張競), 요미원(姚薇元) 등이다. 그런데 수 • 당의 황실이 본디 소속되어 있었던 무천진 군벌, 소위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 불렸던 세력은 [[북위]] [[효문제]]의 적극적인 [[북위#효문제의 한화 정책|한화정책]] 이래 선비족이길 포기하고, 100년간 한족의 말과 풍습을 쓰며 한족과 혼인하고 살았던 집단이었다. 그리고 당 황실에서 고조, 태종, 고종의 모후가 선비족인 것은 확실하나 부계는 의문이다. 집안 스스로가 옛 한족 귀족의 후예를 자처했고, 다른 순수 선비족 가문들과 다르게 한족이 확실했던 사람들과도 연관이 깊었다. 이런 식이라 이들은 자타공인 한족 귀족이었으므로 생물학적 혈통 같은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나라 황실의 공식 입장은 자신들이 한족 왕조의 후예라는 것이었고, 한족계 문벌귀족들도 거기에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당태종]] 시기 법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황제가 말하기를 '짐의 근본은 노자에서 나왔으니 주나라의 은혜를 입고 후손을 이어서 농서에서 일어났노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법림이 듣기에 탁발씨가 존귀해지니 이씨를 자칭했다. 폐하가 이씨인데 이는 곧 탁발씨의 핏줄이며, 농서의 핏줄이 아니다." 라고 한 바 있는데, [[당태종]]에게 죽을 뻔했다. 오늘날 당나라 황실의 혈통이 선비족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는 대개 수•당의 황실이 한족이 아니므로 원나라, 청나라와 유사한 이민족 왕조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중국 혹은 한족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다. 어쨌거나 자신들은 한족의 귀족 출신이라고 자부했으니 그 위세나 자부심이 대단했다. 무덕 3년, 고조 이연은 일찍이 상서우복야 [[배적]]에게 이르길, >우리 이씨는 예전에 농서 지방에서 귀갑과 보옥을 상당수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다.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제왕과 인척이 되었고, 내가 의병을 일으키자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수개월이 지나지 않아 천자에 올랐다. 이전 시대의 황제로 말하자면 대다수는 미천한 출신들로 군대를 지휘하고 진형을 포진시키느라 고생하면서 결코 안심하고 살지 못했다. 공은 대대로 녹을 받는 명가로 회복했고, 지위가 매우 높고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는 관직을 지냈는데 어찌 고작 문서 담당 관리 출신인 [[소하]], [[조참]]과 같을 수 있겠는가?[* 소하와 조참은 전한의 개국공신 1,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초한전쟁에서 막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고, 소하의 경우 관이오, 제갈량에 비견되는 명재상이었다. 고작이라는 말을 들을 인물이 절대 아니다.] 오직 나와 공만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선현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개국군주씩이나 되는 당고조 이연과, 그 절친인 배적이 서로 모여 옛날 황제들은 가문이 구렸던 인간들 뿐이고, 그런 사람들을 도왔던 소하나 조참 같은 사람들은 다들 신분도 천한 잡것에 불과하니 자기들 정도는 되어야 후세에 이름이 남을 거라고 자화자찬하는 황당한 장면이다. 황제부터가 이러는 판이니, 다른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다.[* 당연하지만 옛날이든 현대든 간에 가문의 힘을 빌지 않고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사람을 더 높이 평가한다.] >창업한 군주와 신하 모두 귀족으로 하, 은, 주 3대 이후 모든 왕조는 우리 당나라에 미치지 못한다. 고조는 팔주국 당공의 손자이며, 북주의 명의와 수나라의 원진 두 황후의 외척으로 북주 태사 두의의 딸과 결혼하여 북주 태조의 사위가 되었다. 재상 소우, 진숙달은 양나라와 진나라 제왕의 아들이었고, 배구, 우문사급은 북주 태사와 [[수나라]]의 부마도위였으며, 양공인, 보덕이, 두항은 이전 왕조 사보의 후손이었다. 배적, 당검, 장손순덕, 굴돌통, 유정회, 두궤, 두종, 시소, 은개산, 이정 등은 모두 귀족의 후예였다. [[한고조]] 유방, [[소하]], [[조참]], [[한신]], [[팽월]]의 가문들에 비하면 어찌 가문의 등급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 >소면(蘇冕) 거의 전설적인 존재인 삼황 오제로부터 정통성이 이어지는 [[하나라]]와 [[상나라]], [[주나라]]에 이르는 3대 왕조만이 그나마 자기들 [[당나라]] 황실에 비빌 만하고, [[춘추전국시대]], [[진(통일왕조)|진나라]], [[한나라]], [[삼국시대(중국)|위, 촉, 오]],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 등은 감히 언급할 필요도 없다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황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중책을 맡았던 개국공신들의 가문 역시 대단한 귀족의 가문이었다고 추켜세우면서, 뜬금없이 가만히 있던 한고조 유방을 비롯하여 [[소하]], [[조참]], [[한신]], [[팽월]] 등은 여기에 감히 댈 수도 없는 천한 것들이라고 언급한다.[* 물론 전한의 개국공신 상당수는 정말로 출신이 변변찮기는 했다. 앞서 말했듯 주나라 이후의 왕조들도 뿌리를 캐보면 꼭 한 명은 출신에 결점이 있기는 했다.] 관롱집단은 [[측천무후]]나 [[현종(당)|당현종]] 때 타격을 받아 위세가 위축되기도 하나, 귀족정치라는 큰 틀은 당나라가 이어지는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귀족이라는 계층이 절도사나 환관 등보다 약해졌기는 했지만 소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막연히 생각하기에 자유롭고 호방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미지가 당나라에 있긴 하지만, '''실제로 당나라는 귀족 중심의 나라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신라처럼 진골귀족이 다 해먹는다고 해석하면 곤란하다. 애시당초 능력에 의한 시험(물론 가문도 보기는 보았다.)인 과거라는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당시 제일 선진적인 체제를 갖춘 것이었다.] 가령 당나라의 국자학은 3품관 이상의 자제, 태학은 5품관 이상, 사문학은 7품관 이상의 자제가 배우도록 규정되어, 부모의 관직에 따라 교육의 기회도 달랐다.[* 물론 흙수저가 노력해 과거에 급제해서 3품 이상이 되면 그 사람의 자식은 국자학에 다닐 수는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당나라 중후반기가 되자 귀족 출신과 과거로 합격한 진사 출신의 관료들이 맞붙은 '''우이당쟁'''(牛李黨爭)이 발생했지만 "금수저에 발끈하고 나선 명문이 아닌 집안들"이라는 것도 사실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금수저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귀족 출신의 당나라 황실은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일개 한족 머슴 출신이었던 [[주전충]]에 의해 씨도 안 남기고 멸족당하게 된다.[* [[오대십국시대#s-3|오대]] [[후당]]의 [[장종]] [[이존욱]]은 명백하게 그저 국성을 하사받았을 뿐 아예 [[돌궐]]계인 [[사타족]] 출신이라 당 황실과 혈연적 근친도는 없었고, 남당의 이변은 당태종 이세민의 3남 이각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명백한 근거는 없다. 물론 현재로선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으레 그랬듯이 이미 촌수가 황실과 멀어진 일족들은 전란 와중에 변성 혹은 신분을 감추거나 해서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