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조(북위) (문단 편집) === 몰락의 징조 === 고명대신이었으며 권력을 멀리했고 안팎으로 인망이 높았던 원협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고조의 권세에 역효과를 불러왔다. 안 그래도 황족들로부터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던 고조는 인망까지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옹성 같은 그의 권세에 그것은 아직 작은 흠집 정도일 뿐이었다. 512년 고조는 사도가 되어 조정의 요직에서 물러났다. 사도는 비록 명예상 최고의 관직들인 3공 중 하나이긴 했지만 고조가 이전에 역임하고 있었던 모든 관료들의 인사권을 장악한 직위인 상서령에 비하면 실권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자리였다. 고조도 그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연창(延昌) 초(512년)에 사도(司徒)로 옮겨졌는데, 비록 태정(台鼎)의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요직에서 떠났다는 이유로 불만스러운 기색을 말투와 얼굴빛에 드러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들 침을 뱉으면서 비웃었다. - 《위서》 <고조 열전> 다만 선무제가 이때부터 고조를 멀리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 후술하겠지만 514년의 [[익주]] 정벌에서 150,000명에 가까운 대군을 고조에게 맡긴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선무제의 신임은 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비록 천하의 세력가인 고조라고는 해도 황족들과 공신들로부터 적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그였기에, 지속적인 황족, 공신들의 견제를 못 배긴 그를 선무제가 일단 요직에서 한 발짝 물러나게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어찌 되었건 아직까지 고조는 분명히 [[북위]] 최강의 [[권신]]이었으며, 세력가였기에 종친들과 공신들은 섣불리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무렵 선무황후 고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보지 못한 선무제는 후궁 호씨(훗날의 [[영태후]])에게서 낳은 아들인 원후를 태자로 책봉했다. 원래대로라면 북위의 풍습인 '''자귀모사'''[* '''황태자의 어미는 죽임을 당한다.''']에 의해 후궁 호씨는 죽었어야 했지만 무엇 때문인지 선무제는 호씨를 살려주었다. 이것이 고조가 실각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관습대로 후궁 호씨가 죽었다면 원후가 제위에 오른다고 해도 권력은 선무황후 고씨가 장악할 수 있었기에 고조 역시 권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궁 호씨가 살아남으면서 뒷날 원후가 제위에 오르자 후술한 대로 그녀가 황태후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게 됨으로서 선무황후 고씨와 고조는 정계에서 축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