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준황후 (문단 편집) == [[황태자비]] 내정 == [[파일:attachment/고준황후/n2.jpg]] 결혼 전, 미혼 여성의 예복인 [[후리소데]]를 입은 나가코 여왕의 모습. 당시 [[일본 황실]]은 오랫동안 [[이치죠]](一條) 가문과 [[쿠죠]](九條) 가문에서 번갈아가며 국모를 맞이했다. [[고메이 덴노]]의 정실 에이쇼 황후(英昭皇后)[* 이름은 아사코(夙子). [[데이메이 황후]]에게는 [[고모]]이자 시할머니가 된다. 두 딸 요리코(順子) 내친왕과 후키노미야(富貴宮) 내친왕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각각 2살과 1살), [[고메이 덴노]]의 측실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의 아들 [[메이지 덴노|사치노미야 무쓰히토 친왕]]을 [[양자]]로 [[입양]]했다.]는 [[쿠죠]] 가문, [[고메이 덴노]]의 아들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황후(昭憲皇后)[* 본래 이름은 마사코(勝子)였으나, 결혼하면서 하루코(美子)로 개명했다. 자녀는 낳지 못했다.]는 [[이치죠]] 가문,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사다코)는 [[쿠죠]] 가문 출신이다. 그러니 이제까지의 관례를 보면 다음 차례는 [[이치죠]] 가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황태자비]] 자리를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다이쇼]] 덴노는 심신이 허약하여 나랏일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신하들은 황실과 덴노를 만만히 여기고 더욱 날뛰었다. '''[[일본 육군|육군]]을 장악하고 있던 [[조슈 번]]은 [[화족]] 이치죠 사네테루(一條實輝) 공작의 3녀 이치죠 도키코(一條朝子)를, [[일본 해군|해군]]을 장악하고 있던 [[사쓰마 번]]은 사쓰마 번주의 외손녀이자 방계 황족의 딸인 나가코 여왕을 지지'''했다. 또한 [[조슈 번]]의 원로이자 당시 [[일본]] 정치계의 거물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도키코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도키코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사다코 황후]]는 자신의 남편 [[다이쇼]] 덴노에게 함부로 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미워하고 있었기에, 그가 지지하는 후보를 [[황태자비]]로 삼고 싶지 않았다. [[사쓰마 번]]은 그 점을 알고 은밀하게 [[사다코 황후]]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1918년 2월 4일,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내정되었다는 공식 발표'''를 일제히 언론에 내보냈다. 언론 등에 공개된 것에 따르면 표면적인 이유는 나가코 여왕 본인의 성품이나 소질 뿐 아니라, 황족들 중에서는 비교적 가난한 편이었던 구니노미야 가문의 형편을 예전에 [[메이지 덴노]]가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나가코 여왕은 [[가쿠슈인]] 여학부 중등과를 중퇴하고, 장래의 [[황태자비]]와 [[황후]]로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구니노미야 저택 내에는 나가코 여왕의 교육을 위한 오하나고덴(お花御殿)이라는 건물이 세워졌고, 나가코 여왕의 여동생들과 친구들은 방과 후면 오하나고덴에 종종 들렀다고 한다. 오하나고덴은 훗날 [[도쿄]]도립 코마바(駒場) 고등학교에 하사되었다.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내정되자, [[조슈 번]]과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분노하였다. 1920년, 한 의학 잡지에 "'''나가코 여왕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에 [[색맹]]의 형질이 유전되고 있다!!'''" 는 기사가 실렸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사이온지 긴모치]], [[하라 타카시]] 등과 연합하여 구니노미야 가문에 "황통의 안정을 위하여 황태자비 자리에서 사퇴하라!!" 고 요구했다. 그러나 구니노미야 가문 또한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고, 소란은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번져갔다. 당사자인 [[히로히토]] 황태자는 "나가코 여왕으로 좋다" 고 했으며, 시아버지 [[다이쇼]] 덴노도 "'''[[과학]]에도 틀리는 것이 있는 줄 안다'''" 고 말했다. 이 치열한 싸움의 끝은 황실의 뜻, 국민들의 여론, 일본도로 무장한 협객들의 응원까지 등에 업은 [[사쓰마 번]]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런데 정계에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그가 죽고 난 뒤인 '''[[1924년]] [[1월 26일]]에야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여담으로 도키코는 방계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요시(伏見宮博義) 왕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1947년 [[신적강하]][* [[다이쇼]] 덴노의 직계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평민으로 전락함.] 이후로, 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이치죠 도키코 → 후시미노미야 도키코 왕비 → 후시미 도키코).]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