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창회골 (문단 편집) == 문화 == [[파일:8663C870-86CC-4484-8615-55B6436C8D13.jpg]] * 마니교 벽화 유적 10세기 중반 송나라 사절이 남긴 기록 및 왕연덕의 서역사정기(西域使程記)와 왕연덕사고창기(王延德使高昌記)를 통해 고창회골의 문화만큼은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두 사서는 [[위구르]] 문화사를 연구하는데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고창회골은 남으로 [[토번]], 서쪽으로 [[카를룩]] 동으로는 [[감주회골]]을 흡수한 [[서하]]와 마주하고 있다. 고창회골 주민은 몽골 고원에서 이주해온 위구르인 외에도 [[토하라인]]과 [[튀르크인]],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의 소그드인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노수호]] 및 [[한족]] 상인들도 있었다. 고창회골의 주요 도시에서는 여러 언어가 통용되었으며, 평범한 노예조차 계약서를 직접 읽고 쓸 수 있을 만큼 교육 수준이 높았다. [[몽골 제국]] 시대 위구르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중세 고창회골 도회지 주민 상당수가 [[다중언어|다중언어사용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교는 주로 마니교, 불교가 융성하였으나 토하라인이 믿던 부파 불교는 마니교와 대승 불교에 밀려 교세가 위축되어 사멸한 것으로 보인다. 마니교에서는 원칙적으로는 [[채식]]을 장려하였으나 중국 기록을 보면 정작 주민 상당수가 고기를 즐겨 먹었던 듯 하다.[* 유목생활을 하던 곳이었으니까 당연하다. 저 지역에서 채식만 하다간 굶어죽는다. ] 기독교 역시 번성했는데 당시 이슬람을 믿는 [[카라한 칸국]]과 마니교를 믿는 고창회골 양국 모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가 많았다 한다. 당시 카라한 칸국에서는 불교와 마니교 신자가 드물고 고창회골에서는 무슬림이 드물었으나, 기독교는 이슬람 및 마니교와 금연 관계였기 때문에 양국에서 동시에 번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주] [[분류:14세기 멸망]][[분류:위구르족]][[분류:중앙아시아사]][[분류:신장 위구르의 역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