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환(남북조시대) (문단 편집) === [[이주조]]에 대항하다 === 530년, 효장제는 장인인 이주영이 장차 제위를 빼앗으리라 생각해 그를 황궁으로 불러 죽여버렸다. 이에 이주씨 일족은 이주조와 이주영의 사촌동생 이주세륭(爾朱世隆)이 수령이 되어 낙양으로 쳐들어갔다.('''이주조의 난''') 이주조는 이주영의 아내의 조카인 '''[[장광왕]]''' 원엽(元曄)(제11대)을 황제로 삼았다. 이때 이주조는 고환을 낙양으로 불러 자신을 도우라고 했지만 고환은 지방의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 이주조는 언짢았지만 이미 고환의 세력이 커져 만만치 않았다. 이주조는 결국 낙양을 함락시키고 효장제를 사로잡아 그를 자신의 본거지인 진양(晉陽)으로 보냈다. 이때 고환은 편지를 써서 황제를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이주조는 답장을 보내지도 않고 효장제를 죽여 버렸다. 그럼에도 고환은 이주씨 일파에 속해 있었다. 531년, 흘두릉보번(紇豆陵步番)이 시해당한 효장제의 복수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키자 고환은 이주조를 도와 반란을 진압하고 흘두릉보번을 처형했다. 이 전투 후에 이주조는 고환을 신뢰해 [[의형제]]를 맺었으며, 고환에게 이전 갈영의 부대를 맡겼다. 또 고환이 새로운 부대를 형성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동쪽의 태항산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신도(信都)에서 이주씨에 대항해 반란을 이으킨 고건(高乾)에 맞섰는데 고건은 고환의 먼 [[친척]]뻘이었다. 고건과 이원충(李元忠)은 이주씨 일파는 너무 부패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싫어하고, 결국은 전복될 것이라고 고환을 설득했다. 이때 이주조는 고환의 부대를 자신의 부대로 옮기려 했는데 결국 고환은 반란을 선언했고, 이주조 부대로 옮긴 군인들도 고환을 도와주기로 했다. 한편 이주세륭은 원엽이 지금 황제에게서 너무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광릉왕 원공(元恭)을 황제로 세웠다. 이가 '''[[절민제]]'''(節閔帝)(제12대, 전폐제)였다. 고환이 처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절민제를 황제로 인정했으나, 손등의 건의대로 또 다른 황족인 안정군왕 '''[[폐제(북위)|원랑]]'''(元朗)(제13대, 후폐제)을 황제로 세웠다. 고환 자신은 아주 유능하고 명성이 높은 사령관이었지만 그의 부대는 여전히 약했다. 그리하여 이주씨 일파는 고환의 반란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주세륭만이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532년 이주세륭의 동생인 이주중원(爾朱仲遠), 이주도률(爾朱度律, 이주영과 이주세륭의 사촌), 그리고 이주영의 조카인 이주조까지 모여서 고환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전부터 이주세륭과 이주조 간에 알력 다툼이 있었는데 고환은 이를 이용해 이들을 더욱더 이간질시켰고, 결국 이주중원과 이주도률이 철수해 버렸다. 이후 고환이 이주조의 부대를 격파하자 이주조는 철수했으며, 고환은 업성을 점령하고 이를 본거지로 삼았다. 마음이 급해진 이주씨 일파는 곧 화해했고, 이주조, 이주중원, 이주도률, 이주천광(尔朱天光, 이주영의 종조형의 아들)이 모두 업성에 모였다. 이주씨 일파의 병력이 훨씬 많았지만 고환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주조는 진양으로 돌아갔고, 이주중원 역시 그의 근거지인 동군(東郡)으로 도망갔다. 이주천광과 이주도율은 낙양으로 가려고 했으나, 낙양에는 이미 곡사춘(斛斯椿)이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다. 곡사춘은 이주세륭과 그의 형 이주언백(爾朱彥伯)을 이미 죽였고, 이주천광과 이주도률을 사로잡아 고환에게 보냈다. 이주중원은 동군을 포기하고 [[양(육조)|양나라]]로 망명했으며, 이제 이주씨 일파 중에서는 이주조만이 남게 되었다. 고환은 원랑과 함께 곡사춘이 통제하고 있는 낙양으로 갔는데, 고환은 원랑 역시 너무 먼 황가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폐위하고 새로운 황제를 찾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