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곡물법 (문단 편집) == 내용 == 비슷한 내용의 법안은 중세 이후부터 계속 존재[* 1689년에도 수입산 귀리 및 밀 등에 관세를 매기는 법안이 있었다.]했지만, 역사상 주로 얘기하는 곡물법은 1815년에 만들어진 법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도시화]]와 [[산업 혁명]]에 따른 인구(특히 도시 노동자) 증가와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인해 영국 내에서의 식량 수요는 크게 증가한 상황이었다. 농업생산량도 농업 혁명을 통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지만 아직 식량 수요를 전부 커버할 정도는 아니라서 곡물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덕분에 [[지주]] 계층들은 막대한 이득을 거둬들인다.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 수요가 줄어들자 곡물 가격이 이번에는 추락을 거듭하게 된다. 당시 지주 귀족 계층이 다수였던 영국 의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고자 '소맥 1쿼터(약 12.7 kg)당 가격이 80[[실링]](4[[파운드]])[* 2세기 동안의 [[인플레이션]]을 거친 21세기 현재 기준으로 약 202 파운드이다. 한화로는 40만원 정도.]이 될 때까지는 외국산 소맥의 수입을 금지한다.'라는 규정이 만들어진다. 문제는... '''이 80실링이라는 기준액에 법안 상정 후 곡물가격이 수십년이 지나도록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1828년, 영국산 곡물의 가격 변동에 따라 관세율도 변하도록 규정한 '신곡물법'이 제정되었지만, 곡물법이 지주계급의 이익만을 위하는 법임에는 변함이 없어 도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민들은 작황과 관계없이 늘 비싼 빵을 사먹어야 했기 때문에 이 법에 대한 격렬한 반대운동이 벌어진다. 게다가 산업가 계층에게도 곡물법은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1830년대가 되면 1차 [[산업 혁명]]을 이끌었던 섬유 공업이 점차 [[레드오션]]이 되면서 이윤율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는데, 산업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이 이윤율 하락을 매우려고 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냉혈한 자본가일지라도 임금을 최저 생계비 이하로 깎아버릴수는 없는 노릇이었는데(굶어죽은 시체는 일을 못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본가들이 지나치게 임금을 깎아버리면 노동자들은 산업노동자가 되느니 지주 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자본가와 지주는 경쟁 관계일 수 밖에 없는걸 감안하면 이는 지주와의 파워게임에서 밀린다는 의미가 된다.], 최저 생계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식비가 곡물법으로 인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것과 비슷한 문제는 60~70년대 [[대한민국]]에도 있었는데 당시 저임금 정책을 밀어붙이던 박정희 정부가 국민들의 쌀 수요 증가에 골머리를 앓아 [[혼분식 장려 운동]]과 [[통일미]] 개발에 나섰던 것, 이쪽도 마찬가지로 저임금을 밀어붙여야 하는데 쌀 수요가 증가해 쌀가격이 오르는 마당에 아무 대책도 없이 저임금을 밀어붙이면 안되어서 대책으로 이런걸 내놓은 거다.] 1839년 [[맨체스터]]에서 결성된 자본가 중심의 반-곡물법 단체가 결성되었고, 이 단체를 선두로 몇몇 정치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마침내 곡물법은 1846년 폐지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