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곡물법 (문단 편집) == 영국 역사에 끼친 영향 == * 이 곡물법은 영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법안이기도 한데, 우선 이 곡물법의 타당성을 논하는 과정에서 [[자유무역]]이라는 경제학적 개념이 등장한다. [[데이비드 리카도]]와 같은 일련의 경제학자들이 외국산 곡물의 수입과 이를 통한 영국산 공업품 수출등을 연구하면서 [[비교우위]]라는 개념이 창출한 것이다. ~~ 문제는 보호무역이 다수이던 당시 사회에서 씨알도 안 먹혔다는 거...~~ * 또한 [[보통선거]]가 도입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 법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인 도시민에게는 이 법을 폐지할 정치권력이 없었기에[* 요새야 도시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문제지만, 중세의 봉건적 관습체계가 아직 잔존한 당대 영국에서 권력은 지주들에게 있었고 지주들의 거점이 어딘지를 생각해보면...] 선거권과 관련된 문제의식이 생기게 된 것이다. * 또한 이 법이 폐지된 시점이 [[아일랜드 대기근]]의 시기와 겹친 덕에 사태 해결에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움을 줬다기보다, 미미하게나마 아사자를 줄여주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곡물법이 폐지되었다고 해도, 기근에 시달리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그것을 '''돈을 주고 구입'''할 여유는 별로 없었을 테니. 사실은 곡물법 폐지로 아일랜드 농업의 구조조정이 앞당겨지며 더 많은 소작농들이 대거 일을 잃게 된다. 문제는 싼 농산물 공급이 아니라 아일랜드에서 돈을 벌 일거리가 필요했던 것. ] - 이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곡물법의 혜택을 주로 본 것은 아일랜드의 대지주들이었다. 대기근을 계기로 곡물법을 폐지하자 잉글랜드에 곡물을 수출하던 아일랜드에도 인클로저 현상이 생겼다. 수익을 유지할 수 없게되어 굶주리던 소작농들을 쫓아내고 목축업으로 급속히 전환하는 '축출'이 대거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굶주리게 된 아일랜드인들이 대거 더 발생하게 된다. 전환에 실패한 지주들은 땅을 잃고 함께 미국 이민길에 오르기도 했다. *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할 때, 영국이 중립을 지키는 점에도 영향을 주었다. 곡물법의 폐지로 영국에서 소비하는 곡물중 미국 북부산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30% 가까이 되면서 남부 편을 대놓고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 남부는 농업지대 주제에 면화 재배한답시고 자국군을 굶기는 상황이었다. [[분류:영국(19세기)]][[분류:영국의 구법]][[분류:1815년/사건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