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군 (문단 편집) === 전간기와 항공력/폭격기 만능 사상의 태동(1919~1938) === [[파일:attachment/gladiator.jpg]] 1차 대전 당시 복엽기와 2차 대전 당시의 디자인의 과도기적 모습이 보인다. 위 그림은 [[2차 세계대전]]의 [[몰타항공전]]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림에 나온 영국군의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와 이탈리아군의 [[CR. 42]]는 전간기의 항공기 컨셉에 맞추어 개발된 전투기였다. [[파일:attachment/1937_spain_civilian_war_ger_bomb.jpg]]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자국의 항공 부대와 최초의 공군인 영국 공군의 운용을 지켜본 미국 육군 장군 '''[[빌리 미첼]]'''과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헤]]''' 등은 이러한 공군력의 미래를 낙관하였으며, 장차 전쟁은 공군력의 우세가 전황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미첼의 경우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말에 대규모 [[공수]] 작전을 기획하기도 하였고, 해군보다 항공력을 이용하는 것이 비용과 효과 면에서 미국의 국익을 증진시킬 것이라는 사상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헤 역시 항공기에 의한 전장의 지배가 앞으로의 대세가 될것으로 믿었을 뿐 아니라, 고속/정밀 폭격기의 등장은 전투기조차도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라는 '''[[폭격기무적론]]'''을 당시 열강에 퍼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폭격기 무적론은 폭격기의 비행 성능이 향상되면 전투기의 성능은 더더욱 좋아진다는 점을 놓쳤기에 2차대전 초반 폭격기 잔혹사로 이어졌으며, 결정적으로 나중에 발명된 레이더와 그것을 이용한 조기 경보 체제 등으로 인해서 무너졌다.][* 두헤의 이론은 매우 논리적이고 참신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인내심을 과소평가하는 바람에 [[전략 폭격]]으로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빗나가고 말았다. 거기다, 그의 이론은 민간인이고 뭐고 없고 전장에서 화학탄을 쓰는 게 당연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거라, 요즘같이 부수적인 피해를 억제하느라 군이 스스로를 억제해야 하는 시대엔 더 잘 들어맞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구안에도 불구하고 당시 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군축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미국의 미첼의 경우 과도한 해군 폄하 행각으로 인하여 군에서 쫓겨나게 되는 수모를 겪었다. 두헤는 이탈리아의 미진한 항공 산업으로 인해 그의 예언을 자국에서 실행시킬 수 없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군의 증강이나 신무기 개발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공 전략상의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고, 프랑스는 육군 중시 경향이 강한데다가 [[마지노 선]] 건설에 매달리는 바람에 공군력 증강에는 뒤처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칼 하인츠 프리저 대령이 저술한 '전격전의 전설'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부인한다. 1940년 5월 10일 황색작전 개시 시점에 독일 공군의 가용전력은 3,578대 중 2,589대에 불과했으며 빌헬름 슈파이델 독일공군 대장은 '1940년 5월 10일 당시 활주로에서 이륙한 폭격기 수가 '''1000대''' 남짓이었다고 말했다. 반면 프랑스 공군은 개전 당시 3,562대의 전투용 기체가 가용했다. 서부전역 종결 이후 한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에 방치된 프랑스 공군 기체가 무려 4,268대에 달했다고 한다. 사실상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이 제공권을 잡은 이유는 프랑스의 공군 전력 자체가 미비했다기보다, 1차대전 식의 대규모 소모전을 우려한 프랑스 공군 수뇌부가 전력을 아끼며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은 나은 편이라 미첼, 두헤 등에게 영향을 미친 트렌차트 등의 지론에 따라 폭격기 중심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나, 해군과의 대립으로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대가 되면서 독일에서 나치와 히틀러가 집권, 재군비를 추진하는데, 독일의 발달된 기술력 덕분에 어렵지 않게 당대 다른 나라에 비해 우수한 항공기를 보유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문제는 상대국의 방공망을 뚫고 적의 도시를 폭격할 장거리 폭격기보다는 당장 전선에서 아군을 지원하고 적의 주요 군사시설을 파괴할 [[급강하 폭격기]]의 개발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의 쌍발 폭격기들도 전략 폭격을 못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을 엄호할 장거리 호위전투기를 제대로 개발하지 못 하는 바람에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참패하게 된다. 또한, 전략 폭격기를 대규모 투입한 연합군도 장거리 호위기들이 없었던 43년 중반 까지는 탈탈 털리고 있었다. 독일의 재군비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도 군사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으나, 영국의 경우는 독일과 맞먹는 [[레이더]] 기술과 보다 발전된 항공력에 대한 이해, 그리고 상대적으로 우월한 공군의 지위 덕에 빠르게 통합되고 효율적인 방공 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나, 프랑스의 경우는 단순히 전투기의 수를 늘리는 데에만 치중했을 뿐 작전체계가 허술했고, 대지 공격용의 폭격기와 공격기에 대한 개념도 부족한 데다가 무엇보다 보유수조차도 적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육군 및 해군이 각기 육/해군 항공대를 운용하는 식으로 편성했지만 유럽 각국을 뛰어넘는 생산력을 가지고 있었고, 국토의 크기 덕분에 항공 산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민간에서 충분한 인력자원을 충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해군 항공대의 경우는 해군 군축 때문에 [[항공모함]]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미첼에 대한 안 좋은 추억과 여전히 팽배한 [[전함]] 중심의 사상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