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공동경비구역 (문단 편집) === 1991년 김유찬 일병 월북 사건 === 1991년 3월 1일 오전 10시 10분경, JSA에서 근무하던 [[한미연합군사령부]] 소속 [[카투사]] 김유찬 일병(당시 23세)이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경비근무를 하던 도중, 공산군 측 휴게실 쪽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월북하였다. 김유찬 일병의 월북은 정전협정 이래 JSA를 통한 국군 장병 최초의 월북이었다. 김 일병은 1990년 10월에 [[성균관대학교]] 체육교육과 4학년 재학 중에 카투사로 입대하였고, 1991년 2월에 공동경비구역에 자대 배치를[* 당시는 미군이 JSA를 관할하던 때라, 카투사가 배치되었다.] 받았다. [[https://www.jrinews.com/8620/|#]] 이 소식은 월북 당일 북한의 평양라디오가 보도하였으며, "한국군에서의 고된 복무에 환멸을 느껴 월북했으며, 위대한 김일성 주석과 친애하는 김정일 지도자의 영도 아래 의식주 걱정이 없는 북한에서 살기를 몹시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030200329214008&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1-03-02&officeId=00032&pageNo=14&printNo=13982&publishType=00020|#]] 월북 이후, 김유찬 일병은 북한의 선전매체나 삐라에 자주 등장하였다. "월북용사 김유찬을 열렬히 환영!"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북한의 대남선전 전단에는 김 일병이 월북 당일 한국군의 군복을 입은 채 평양으로 이동해서 환영나온 인파들에 오른손을 들어보이는 모습이 나온다. 또한 김 일병의 옆에는 1983년 한국군 상병 신분으로 월북했던 김용환과 그의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촬영한 사진이 배치됐다. 다른 사진에는 김유찬 일병이 오른쪽 주먹을 불끈 쥐고 뭔가 외치는 모습과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인터뷰하는 장면도 있다. 이후 나온 선전물에는 김유찬이 좀 더 나이가 들어있었는데, 북한에서 결혼한 김유찬이 아내와 아이들을 안고 꽃밭에서 사진 촬영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또한, 김유찬의 아내가 JSA 근무 당시 남편의 옛 동료들에게 보낸 엽서도 공개됐다. >지겨운 군 복무로 고생많다가 전방근무 절호 기회에 의거용단 내려 이북서 꽃같은 생활을 찾은 이가 저의 남편입니다. 민족의 기강과 인간존엄이 있고 평등과 화목, 밝은 미래가 기약되어 있는 이북에 와서 청춘의 이상 마음껏 곷피우세요. 김유찬의 아내 최명희 >받을 사람 남편의 옛 동료분들에게 / 보내는 사람 평양에서 최명희 >---- >— 북한 대남선전 전단 내용 중 [[https://www.jrinews.com/8620/|#]] 또한, 2016년에는 한 블로거가 발견한 대남선전 전단에는 인민군 군관복을 입은 김유찬이 있었고,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미제와 박근혜역적패당이 제아무리 <[[키 리졸브]]>, <독수리 16>합동군사연습으로 그 누구를 놀래워 보려고 하여도 자위의 핵보검을 틀어쥔 영웅적조선인민군을 당할수 없다. <국군> 장병들이여! 미군의 방패로 나섰다가 개죽음 당하지 말고 총부리를 침략자 미군에게 돌리라! >전 <유엔군사령부> 판문점 공동경비대 경비중대 일병이였던 조선인민군 군관 김유찬 >---- >— 2016년, 북한 대남선전 전단 내용 중간에서 [[https://www.jrinews.com/8620/|#]] 즉, 월북한 김유찬 일병을 이용한 대남선전을 최소 25년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