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동경비구역 (문단 편집) == 공동경비구역의 형성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0061802160630003010-001.jpg|width=100%]]}}} || || '''{{{-1 1953년 당시 판문점}}}''' || 국방색 군용 텐트가 쳐진 방향(+ 헬기가 주기되어 있는 방향)이 대한민국 문산 쪽 방향이고, 허허벌판으로 하얀 건물이 있는 쪽이 전쟁 후 북한령이 되고만 개성 쪽 방향이다. [[군사분계선|휴전선]]은 사진 기준으로 10시와 4시 방향으로 그어져 있다. 사진 왼쪽 기준 시커먼 텃밭(일명 썩은 밭) 까지가 대한민국이며 그 위는 북한이다. 판문점 남동쪽 상공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은 실제 정전협정 조인이 이뤄진 판문점이며, 현재는 "정전협정조인장"이라고 설명되는 곳이다. 이 곳과 현재의 판문점은 다른 곳이다. 사진의 지역은 현재의 판문점으로부터 약 1km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구글 지도를 통해서 판문점을 검색해보면, 북서쪽에 "정전협정조인장"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6.25 전쟁]] 전만 해도 조선시대 [[의주로]]와 사천(砂川)내가 만나는 지점의 이름없는 한촌(閑村)으로 초가집 몇 채뿐이었지만 1951년 10월 25일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세계 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6.25 전쟁)|휴전협정]]이 이 곳에서 [[조인]]되면서 이 곳의 명칭은 [[유엔군사령부|유엔군]]과 인민군의 '공동경비구역 JSA'으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 9월 초까지의 포로 교환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곳이 휴전선보다 북측에 있는 것이 문제였고, 결국 1953년 10월 동쪽으로 약 1km 이전하여 휴전선 위에 새로운 판문점을 설정하고, 중립국 감독 위원회 관할로 포로교환장소 건물을 짓게 되었으며, 이 건물들은 현재 판문점에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하늘색과 회색 건물의 원형이 되었다. 하늘색 건물은 유엔군 측, 회색 건물은 북한 및 중국군 측 포로 교환 장소라고 보면 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uilding_where_the_Korean_Armistice_Agreement_was_signed.jpg|width=100%]]}}} || || '''{{{-1 예전의 판문점. 현재는 북한 측 "정전협정조인장"}}}''' || 옛 판문점은 "정전협정조인장"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견학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북한 쪽을 통해서 판문점 견학 시 반드시 거쳐가는 관광 코스이다. 평화 박물관이라고도 불리워지며 내부에 도끼만행사건 당시 사용되었던 도끼를 전시해놓았다. 그 외에 여러 사진 자료를 전시해놓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북한 측 판문점 견학은 매우 어렵다. 북한 측 초청에 의해서 대한민국 [[통일부]]의 허가를 받아서 방문하는 등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튜브 등에 보면, 북한 측 판문점 관광객들이 올려놓은 영상을 볼 수 있다. 외국 관광객들이 올린 사진들을 인터넷에서 확인 할 수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Qv0c3A0l-V8)]}}} || || '''{{{-1 판문점에서 북한병사와 '인생샷' 찍던 썰(ssul)…'그땐 그랬지' | 2018.4.26. 비디오머그}}}''' || 공동경비구역 명칭 그대로 유엔군과 북한군에 의해서 공동으로 경비가 되던 구역이었다. 그래서 북한군 초소가 현재 남측 경비구역에 설치가 되었으나, 반대로 유엔군 경비 초소는 북측 경비구역에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서로 가끔 같이 사진을 찍거나 맞담배도 피우는 일도 흔했다고 한다. 그러나 판문점 서쪽 사천의 '[[#s-4.1.3|돌아오지 않는 다리]]' 부근에 있던 미루나무에서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에 의해 발생한 [[8.18 도끼만행|도끼만행사건]]으로 인해 미군 장교 아서 보니파스 소령과 마크 배럿 대위가 사망하면서, 사건 당일 북한군은 대한민국 측에서 도망치듯 모든 대한민국 초소에서 철수하였다. 이후에는 북측은 북한군이, 남측은 유엔군이 경비하는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자세한 것은 [[8.18 도끼만행]]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