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리주의 (문단 편집) == 대중적 인식 == >[[의도는 좋았다|좋은 의도였다면 나쁜 결과를 가져왔어도]] 용서할 수 있지만, 좋은 목적을 가지고 나쁜 수단을 써서는 안 된다. >----- >토마스 아퀴나스, 이중결과의 원리 "열차 사고로 다섯 명이 죽는 걸 막기 위해 한 명을 밀어야 하는가?"로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는 공리주의를 소개할 때 쓰이는 대중적인 예제다. 공리주의는 [[행복]]을 도덕의 유일한 기준으로 보며, 상기한 바처럼 [[자유]] 등 [[천부인권]]은 그 자체로는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옆 동네]]의 [[지그문트 프로이트|프로이트]]에 맞먹는 엄청난 어그로를 자랑한다. [[고등학교]] 도덕 교과서를 비롯하여 공리주의를 가볍게 다루는 대중적 서적에서 공리주의를 때리는 것도 그런 이유. * 실제 공리주의를 실현하는 것에 관해서 아주 많은 논점이 제기될 수 있다. * 공리주의를 엄격하게 실현하려면 일단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만 남기고 전 재산을 빈민들에게 기부해야 할 텐데, 현대에 가장 극단적인 공리주의자로 꼽히는 [[피터 싱어]]조차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거기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것은 딱히 인간만을 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동물권|야생동물이나 소나 돼지, 닭과 같은 가축의 행복을 인간의 행복과 동등하게 고려]]한다고 생각하면 사실상 인류가 존속할 수 없다.[* 단, 의무론 역시 엄격하게 실현하면 [[비동일성 문제|인류가 존속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그리고 공리주의는 일반적으로 의무론에 비해 인류의 존속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일정 수준의 희생을 감수하고 공리적으로 인간과 동물을 존속시키려 할 것이다.] * 하지만 자유를 옹호한다고 자유지상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자유지상주의를 논박하는 근거로 자유주의자를 비난할 수 없듯이, 공리주의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도 약간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 다른 사람의 행복을 느껴볼 수 없는 상황에서 여러 사람의 행복을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 세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얻는 행복과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위키질을 하면서 얻는 행복은 동등할까? 양적 공리주의의 대답은 'Yes'이지만, 여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행복과 육체적인 행복을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지도 문제가 되며, 동물의 행복도 고려해야 할지도 문제가 된다. * 질적 공리주의가 옳다면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이 위키질을 하며 얻는 쾌락보다 질적으로 우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를 판단하는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두 개를 놓고 더 많이 선호하는 쪽을 질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한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며, 학생들이 심슨가족과 셰익스피어,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 생각하는가 거수를 하게 한 결과 [[윌리엄 셰익스피어|셰익스피어]]가 우세했지만[* 여담으로 일부는 심슨 가족의 세태풍자적인 요소를 들며 심슨가족에서 셰익스피어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다.], 자유시간에 뭘 하고 싶은가에 대해선 심슨가족 시청이 우세했다고 한다. 밀은 인간에게 돼지와 달리 질적으로 우월한 쾌락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고, 이는 환경이나 개인의 상황에 따라 말라버리기도 쉬운 능력이라고 하며, 그런 사람들로서는 차선책으로서 양적으로나마 우월한 저속한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고 하며 주위에서 숱하게 볼 수 있는 '우월한 쾌락을 두고서도 저속한 쾌락을 추구하는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 어쩌면 밀은 그런 의미에서 성과위주적인 현대사회를, 또 아도르노처럼 현대의 대중문화를 공리주의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할 지도 모른다.[* 문장에 중의성이 있어서 부연하자면 아도르노가 공리주의를 운운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 주관적 공리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저울질해야 할 때가 생기는데, 어디까지의 미래를 고려대상에 넣어야 하는지,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같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라면 이자율 혹은 할인율을 적용해야 하는지, 한다면 몇 %로 정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 '공리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실제로는 공리를 저해할 것이다' 라는 식의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대다수가 집단 내의 소수를 제거하는 것에 계속적으로 찬성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전체 집단이 붕괴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공리주의자라면 나치의 행태를 묵인하는 것이 미래에 불러올 일들을 모두 고려하여 생각해본 후, 나치에 대항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결국 이 주장은 '공리주의를 시행할 때에 조금 더 똑똑하게 결과를 계산해야 한다' 라는 조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행위 공리주의 대 규칙 공리주의' 논쟁이 촉발되는 지점. * 상기한 "공리주의는 느슨하다" 비판의 예시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소수의 행복'은 조금 침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다수를 위해 소수의 자유를 희생하는 행위는 언제나 일어나고 다른 도덕 원리로도 정당화된다. 대표적인 예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일부 범죄자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감옥. 그리고 공리주의는 기본적으로 최소의 희생을 주장하게 되니 다른 도덕 원칙에서의 선행에서 더 나아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목표를 갖게 된다. 다른 도덕 원리는 결과적으로 희생자가 몇인지 상관을 안하기 때문에 적은 사람을 구하는 방법이라 해도 비판할 수 없기 때문. 결국에는 정도의 차이인데, 공리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금 '덜 절실한' 상황에서까지 다수를 위한 정책을 지지한다. * 개인의 행복 추구에 [[법률]]이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공리주의'를 '이기주의'와 혼동하면 안 된다.''' 공리주의는 모두가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이지,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다. 도덕과 법률은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과하게 추구하여 타인의 행복과 충돌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즉 [[토머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불행한 소수의 행복 추구를 법이 막는다는 등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법률에 관한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법의 기본적인 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공리주의에 반대된다. * 공리주의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한 명의 완벽한 인간이나 완벽한 시스템이 생산과 분배를 비롯한 모든 것을 매우 [[적절]]하게 조절하는 사회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은 없고 완벽한 인간이란 신이라도 만들어낼 수 없으니 의미가 없다. 다른 도덕 윤리와 마찬가지로 여러 면에서 현실과 타협을 이루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근본적인 논쟁거리들을 제쳐놓고 보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이념은 일상적인 수준에서는 문제시 되지 않는다. 일상적인 판단의 수준에서 혼자만 잘 되려는 것을 나쁘게 본다거나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것을 선호한다거나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보는 보편적인 윤리의식이 공리주의와 부합한다. *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공리주의가 상황에 따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해 허무주의와 함께 엮이며 무언가를 지키려는 의지를 약화하는 것으로 악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매우 완벽하고 틀림없는 잣대를 따르는 [[원칙주의|원칙]]에 입각해야 한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희생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용납되겠지만, 원칙적으로는 그 희생을 미리 막는 것이 더 이상적이므로 권장된다. 마찬가지로, [[딜레마]]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할 선택이라면 처음부터 막아서 최선의 과정과 절차를 방해할 것을 치우는 것이 옳다.[* 기근이 닥쳐서 식인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없애기 위해, 기근이 오지 않도록 막거나 미리 식량을 축적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 최근 인터넷 상에서 물결처럼 번져나가는 [[코로나 19]] [[백신 반대 운동]] 또한 공리주의의 비판과도 일치한다. 물론 백신이 나쁘다고 정의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백신의 인과성 입증 불허는 백신이 절대다수에게 주는 안전이라는 공공의 이익이 소수의 부작용 또는 사망사례보다 크다는 공리주의적 논리에 의거한다. 보편적으로 대한민국을 포함한 대개의 국가들은 공리주의에 따라 부스터샷을 비롯 백신 패스를 사실상 반강제로 도입 중이며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는 자들이 파고드는 공리주의의 맹점 중 하나가 바로 '절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될 수는 없다' 는 반론이다. 실제로 백신 거부자들은 저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으며 개중에는 공리주의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 대표적으로 [[음모론]]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공리주의적 논리와 연관된 백신 거부자들은 "부작용 인과성 인정을 해주면 백신을 맞겠다." 또는 "인과성을 인정받아도 백신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 때문에 맞을 수 없다." 로 갈리고 있다. 전자의 경우 백신을 이미 맞은 피접종자들에게서도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으나 한 번의 인과성 인정이 차후 백신 개발을 저해하는(또는 공리주의의 지속을 방해하는) 공리주의적 논리에 의거해 어쩔 수 없이 접종하거나 거부하는 경우이며, 후자의 경우 인과성 인정과는 별개로 공리주의에 의한 피해 또는 손실이 자신(소수)에게 올 가능성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