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산당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활동 === [include(틀:일제강점기 한국 공산주의 단체)] 한국 공산당의 역사는 [[고려공산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에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문창범]]의 주도하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소련)이 설립되었고, 192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내 좌파와 [[이동휘]]의 주도로 상해파 고려공산당(중국)이 설립되었다. [[이르쿠츠크]]파가 볼셰비키 속성이 강했다면, 상해파는 중국공산당처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운동단체 성향이 강했다. ~~그리고 레닌한테 200만루블 타내기~~ 해외의 한인 공산당도 정통성 문제를 두고 파벌대립을 하였는데, 제1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임시정부와 항일무장투쟁 단체에서 용공-반공을 둘러싸고 대립이 일어났다. 우선 임시정부의 경우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보수층은 혁신세력 및 소장파들이 공산당을 받아들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러한 갈등은 제2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서 증폭되었다. 결국 고려공산당을 만든 [[이동휘]]는 시베리아 벌판으로 쫓겨났고 심복 [[김립(1880)|김립]]은 상해 한복판에서 김구가 보낸 청년들에게 암살당했고, 고려공산당 회원 [[여운형]]은 동남아로 떠나버렸다. 한편 무장투쟁 쪽에서도 용공-반공의 대립이 있었다. 반공성향이 강하여 중국 국민당군과 협력하려했던 [[이범석]], 지청천의 한국독립군, 중국 공산당군과 협력하려했던 [[김두봉]]의 조선의용군 세력은 용공-반공 문제를 두고 합작을 꺼렸고, [[김원봉]]은 사상보다 항일투쟁과 민족해방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여 [[국공합작]] 시기에 양쪽의 군사협력을 추진하였다. 한편 1920년대 이후 국내 독립운동은 공산주의자들이 이끌었다. 조선공산당원 및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은 [[6.10 만세 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그 연장선인 경성 여학생 운동, 혁명적 노동조합, 농민운동 등의 대중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가 뒤늦게 사회주의자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게 된 데에는(중략)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혁명가 대부분이 계급 혁명에 앞서 민족 혁명을 주장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온몸을 바쳐 싸웠다는 사실이 역사 연구자들의 노력에 의해 하나둘 밝혀지면서 포상의 근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략)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조차 그 출발점은 사실상 민족주의였다. > >198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운동사 연구를 주도해 온 몇몇 연구자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코민테른과 소련의 지도 아래 계급 혁명을 추구한 것으로 보았다.(대표적인 보기가 서대숙,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등이다.) (중략) 그러나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것은 계급 차별이 없는 사회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강력하게 당시 사회주의자들을 혁명 운동으로 이끈 것은 민족 해방에의 열정이었다.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은 민족 문제 해결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민족 해방이었다. 민족 해방을 이룬 뒤 계급 해방을 이루자는 일종의 2단계 혁명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 >흥미로운 것은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이 이전부터 존재하던 독립 운동의 한 분파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 고양되고 있는 국제 혁명 운동의 분위기를 적극 활용하려고 한 일부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새로운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된 사회주의자들에게 운동의 일차적인 과제는 독립이었다. 민족 해방을 위한 새로운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회주의 운동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출신 배경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상당수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기 이전에 이미 독립 운동에 종사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 >이준식, 독립운동가 김한 학술회의 기조발제 >현재 세계 정세는 식민지 민중 대 제국주의 군벌의 투쟁과 무산자 계급 대 자본가 계급의 투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국주의 군벌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투쟁은 민족적 정치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자본가 계급에 대한 무산자 계급의 투쟁은 계급적 경제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 >그러므로 식민지에 있어서는 민족 해방이 곧 계급 해방이고 정치적 해방이 곧 경제적 해방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식민지 민족이 총체적으로 무산자 계급이며 제국주의가 곧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당면한 적인 침략국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인 모든 권리를 탈환하지 않으면 죽음의 땅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형제여! 자매여! 눈물을 그치고 규탄하라! 전 세계의 피압박 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춰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 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중략) > >형제여 자매여! 최후까지 싸워 완전 독립을 쟁쥐하자! 혁명적 민족운동자 단체 만세! 조선 독립 만세! >---- >[[조선공산당]]이 기획한 [[6.10 만세 운동]]의 전단[* 출처: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일제의 폭압이 가장 극심했던 1930-1940년대 이재유가 이끈 [[경성트로이카]]는 전위당 이론을 거부하고 대중운동에 기반했으며 [[경성트로이카]] 출신 이관술은 파벌을 초월한 공산주의자들의 최후집결체 [[경성콤그룹]]을 만든다. [[이재유]], [[이관술]]이 각각 일제 피의자신문조서와 회고록에서 '조선의 적화를 위해 활동한 것이 아니라 조선 독립이 근본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활동했다', '민족의식에 기반해 운동하다 보니 공산주의자가 되어버렸다'라고 한 바 있다. 1930-1940년대의 저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계열이 국내 독립운동의 압도적 주류인 상황이고 또 당시 노동자를 위한 복지 이론이 마땅히 등장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의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이재유는 다음과 같이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을 묘사한 바 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하는 독립운동일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운동이기도 했다. >처음 1~2년은 식사만 제공받을 뿐 무보수로 18~19시간 혹사당하며 (중략)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한달에 한번밖에 외출할 수 없고 외출할 때는 감독자가 따라 나간다. (중략) 그녀들은 언제나 80도 이상의 더운 곳에서 일하며 바람이 통할 구멍조차도 없는 곳에서 혹사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나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있었던 5년 이상의 직공 8명 중에서 지금은 단지 2명밖에 있지 않고 6명은 모두 죽었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죽어야 할 사람만을 알았던가? >---- >이재유가 묘사한 당시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 복지 이론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이 시기 자본주의 병폐(대공황, 노동착취 등)를 비판하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또 해외 독립운동은 식민지 조선 대중과는 분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반제동맹, 이재유 그룹, 경성콤그룹의 활동과 같은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독립운동 갈래 중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운동하는 거의 유일한 갈래였다. 그들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① 민족적 계급적 정치적 투쟁의 자유 >② 파업 농민의 행동에 대한 경찰 군대의 탄압 반대, 파업 농민투쟁의 자유, 노조 농조 기타 모든 근로자 조직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 부르조아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 투쟁에 조정제도를 적용하는 것과 관헌 재판소 경찰 등이 간섭하는 것 반대. >③ 모든 사형제도의 철폐. >특히 정치범에 대한 사형 절대반대. >경찰횡포에 의한 모든 희생자와 정치범의 즉각 석방. >치안유지법, 출판법, 제령 제7호, 폭력행위취체법 철폐. >④ 근로자의 출판집회언론 등의 무제한의 자유. >정치적 대중집회와 데모의 완전자유, 모든 경영내에서 경영위원회를 창립할 자유, 경영위원회의 승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단의 창설. >⑤ 소작료 지불의 거절, 지주 부르조아에 의한 농민수탈반대. >지주 고리대금업자 은행 크러스트 금융조합에 대한 농민의 모든 차금의 전멸. >잡세 지불거부, 수리조합비 지불거부. >⑥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모든 법령의 철폐. >형평사에 대한 진정한 동정, 부인의 완전한 평등권, 모든 민족적 차별의 철폐. >⑦ 반노예적 농노조건 반대. >기숙사제적 속박 반대[* 이재유가 묘사한 당시 여성 노동자의 환경 중 기숙사에 속박당하는 처지와 관계된다.].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노예제도의 낡은 형태인 '''년기계약제의 반대'''[* 요즘으로 치면 비정규직 반대와 비슷하다.]. >부인, 청년의 이중착취반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부인아동의 공연 은묵의 매매제에 대한 형벌 >⑧ 부르조아적 산업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16세 미만의 소년에 대한 4시간 노동제 >18세 미만의 청년에 대한 6시간 노동제 >유년노동금지 >'''1주 40시간제'''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 >⑨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임금''' 확립 >'''임금에서 공제 선취의 금지''' >임금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 >⑩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 >---- >이재유와 이관술이 만든 《적기》의 슬로건[*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p323~324] >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이 대중 속에서 활동한 결과 대중에 뿌리내린 지도중심을 형성하고 점차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해 갔다. 지역과 대중에 뿌리박은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해방 후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나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이 급속하게 결성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박한용, [[http://m.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bc5f7ddbb4d7c61bffe0bdc3ef48d419&keyword=%EB%B0%98%EC%A0%9C%EB%8F%99%EB%A7%B9#redirect|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p4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선공산당)]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