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손연(삼국지) (문단 편집) == [[삼국지(정사)|정사]] == 공손씨는 공손연의 할아버지 [[공손도]] 때부터 대대로 [[요동]] 일대를 점거하고 있었다. 공손연의 아버지 공손강은 [[조조]]가 [[원소(삼국지)|원소]]의 잔존세력을 소탕할 때 [[원희]]와 [[원상]]을 [[참수형|참수]]해 화평을 청했다. 221년에 아버지 [[공손강]]이 사망하자 나이가 어린 까닭으로 숙부 [[공손공]]이 뒤를 이었지만 228년에 공손공을 내쫓고 스스로 요동 지방의 군주로 군림했다. 이때 [[조예]]는 그에게 거기장군 자리를 하사했다. 232년 [[오(삼국시대)|오]]의 [[손권]]이 연(燕)왕의 작위와 [[구석#s-3]]의 지위를 내려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장미(삼국지)|장미]]와 허안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은 사신이 가지고 온 보물을 탐내었고 무엇보다 애초에 손권과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어서 두 사신들을 목베고 보물을 빼앗았다. 이렇게 손권의 뒤통수를 후려갈겼고 이 때 참수한 오나라 사신들의 목을 [[위(삼국시대)|위나라]]에 진상해 낙랑공이란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때 오의 사절로서 파견되었던 [[주하]]는 살아서 배를 타고 돌아가려 했지만, 풍랑을 만나 좌초되어 청주의 해안까지 떠내려온다. 이를 예측한 [[전예]]가 산둥 반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주하를 사로잡는다. 그나마 살아돌아온 일행이 위에 붙잡혔으니 오가 공손연에 파견한 사절들은 모두 좋은 꼴을 보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위나라는 공손연에게 계속 의심을 품었고 결국 237년 [[관구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했다. 위군을 격퇴해 낸 공손연은 스스로 [[연호]]를 소한(素漢)으로 하고 연왕을 자칭해 독립까지 선언하게 된다. 이때 말리는 [[가범]]과 [[윤직]]을 [[처형#s-2]]했는데, 공손연의 반란 소식이 위나라 조정에 알려지자 수도인 [[뤄양|낙양]]에 인질로 가 있었던 그의 형 [[공손황]]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실 공손황은 공손연의 반란 이전부터 계속 모반의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볼모의 특성 상[* 본보기로 보여야 하는 측면도 있다. 안 죽이면 볼모를 잡아봐야 씨알도 안 먹히니까 말이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위나라 입장에서는 공손황의 의도가 후계 구도를 염두에 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확실치도 않은 상황이라 살려주지 못할 이유가 많았다. 그런데 공손연은 238년 [[사마의]]가 이끄는 위나라의 군대[* 연의에서 사마의는 '''가는 데 4개월, 공략하는 데 4개월, 오는 데 4개월로 총 1년이 걸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했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실제로 이루어졌다]].]와 [[고구려]] [[동천왕]]이 파견한 군대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공손연은 크게 두려워하며 살기 위해서 상국 [[왕건(삼국지)|왕건]](王建)과 어사대부 [[유보(삼국지)|유보]](柳甫)를 보내 포위를 풀어줄 것과 면박(面縛)[* 양손을 등 뒤로 돌려 결박하고 얼굴을 들게 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하여 [[항복]]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왕건과 [[유보(삼국지)|유보]]의 목숨을 빼앗고는 곧바로 공손연에게 격문을 보냈다. >옛날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楚)와 [[정나라]](鄭)는 열국이었으나, 정백[* 당시 정나라 군주였던 정나라 양공을 말한다. 정나라 군주는 [[오등작]] 중에 [[백작]]이었다.]은 웃통을 벗고 [[양(동물)|양]](羊)을 끌고 나와 초왕을 영접했다.[* 초나라 [[초장왕|장왕]]이 침공해오자 정나라 양공은 웃통을 벗고 양을 끌고 나와 항복했다. 웃통을 벗는 것은 항복, 양을 끌고 나오는 것은 하인이 되어 주인을 섬기겠다는 뜻으로 결국 항복 의식이었다. 훗날 [[서진]] 민제 [[사마업]]도 전조의 [[유총]]에게 항복하면서 이 의식을 행하는데, 이 두 의식을 행한 것은 물론이고 구슬(시신을 염할 때 입에 물리던 옥구슬)을 입에 물기까지 했다.] 나는 왕의 신하로 상공(上公)인데 왕건 등이 내게 포위를 풀고 물러나라고 하니 어찌 초나라와 정나라의 전례에 비기겠는가! 두 사람은 늙고 혼미하여 필시 말을 전하는데 실수가 있었을 터이므로 이미 죽였다. 만약 더 할 말이 있다면 젊고 명쾌하게 결단할 수 있는 자를 보내도록 하라. 이에 공손연은 시중 [[위연(공손씨 정권)|위연]](衛演)을 보내 날짜를 정해 [[인질]]을 보낼 것이라고 청했다. 이때 사마의는 그 유명한 [[명언]]을 위연에게 말하며 거절한다. > '''군사로 맞설 때는 중요한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싸울 수 있을 때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싸울 수 없을 때는 마땅히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마땅히 달아나야 한다. 나머지 두 가지는 항복 아니면 죽음뿐이다.''' 너희들은 스스로 면박하려 하지 않으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일 터, 인질을 보낼 필요는 없다('''軍事大要有五, 能戰當戰, 不能戰當守, 不能守當走, 餘二事惟有降與死耳.''' 汝不肯面縛, 此為決就死也, 不須送任). 이에 절망한 공손연은 남쪽의 포위를 공격하여 돌파하니 사마의는 추격하여 공손연과 그 아들 [[공손수]]를 잡아 참수했다. 그리고 사마의는 수도 양평성(襄平城)[* 후에 고구려의 요동성, 현재의 중국 랴오닝 성 랴오양 시다.]에 들어간 후 두 개의 표식을 세워 젊은이와 늙은이를 구분했는데, 15세 이상 남자 7,000여 명을 모두 죽이고, 경관(京觀)[* 사람을 죽이고 해골을 쌓아 흙으로 덮어 산을 이룬 것으로, 고대의 전승기념비이다. 훗날 이 기록을 접한 동진의 [[진명제|명제]]는 '저런 짓을 했으니 서진이 금방 망했지.'라고 디스한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에 '저런 짓'을 서진만 한게 아니어서.. 고구려도 경관을 만든적이 있다.]을 만들었다. 그리고 공경(公卿) 이하 관원을 모두 주살하고 장군 필성(畢盛) 등 2,000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이때 공손씨는 멸족되는 비운을 맞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