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수부대 (문단 편집) === 소련 제9근위군(9th Guards Army) === 진정한 첫 시작은 [[소련군]]이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 직후, 새로운 전략, 전술의 개발에 매진하던 소련군은 특히 '붉은 군대의 보물'로 불리던 전략이론가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기동전]] 개념을 자신의 [[종심작전]]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적 후방 지역 공격을 [[파르티잔]]과 연계함으로서 적군에 의한 세계 공산화 달성의 전위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라는 구호와 함께 공수부대, 당시 공군 공정대의 창설에 힘을 기울였다. 대숙청으로 인해 투하쳅스키가 사망하긴 하였으나 공수부대는 계속 연구되었고, 1931년에 사상 최초로 경[[전차]]를 기반으로 만든 [[공수전차]], 76mm 대전차 포를 포함한 중대 규모 병력을 수송기와 글라이더로 낙하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에 고무된 소련군은 33년에는 사단 규모, 35년에는 군단 규모로 공수부대를 확대시킨다. 특히 35년, 유명한 '[[키이우|키예프]] 대연습' 당시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무관들 앞에서 여단 규모의 공수작전을 실증해 보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초창기 공수부대는 공수 낙하 기술이 정립되지 않아서 이런 충격과 공포스럽게 비행기에서 낙하했다. [youtube(aJ-CmHc3bSg)] 소련에서는 [[독소전쟁]] 개전 당시 10개 공수 군단이 편제되어 있었으나, 초반에는 워낙 수세였기 때문에 공수작전을 할만한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42년 2월 고립된 독일군을 포위한 비야즈마 포위전에서 소련군 공수부대가 강하했고, 1943년 [[쿠르스크 전투]] 때가 되면 공수부대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43년 9월에 후퇴하는 독일군을 교란하기 위해 드녜프르강 서안에 대거 강하하였으나 독일군의 수비가 견고하여 소련군 공수부대는 큰 피해를 보았다. 1944년에는 소련군의 모든 공수부대가 제9근위군이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었다. 챙을 잘라놓은 철모를 사용했던 팔쉬름예거, 폴고레 공수 사단, 붉은 악마들과 달리 파일럿 헬멧같은 형태의 헬멧을 착용했다. 무게 면에서 상당히 가벼워져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또한 고고도에서 뛰어내리는 공수부대 특성상 방호력 대신 유용함을 선택한 케이스.[* 소련군은 병과를 가리지 않고 전쟁 내내 병사들이 철모를 잘 쓰지 않았다. 저 당시 기술력으로는 권총탄도 제대로 방호하지 못했던 관계로 철모가 무게만 무겁고 효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 철모를 쓰지 않자 파편에 의한 사망자가 대량 발생하였던 관계로 전쟁 후기에는 많이 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