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양왕 (문단 편집) === 반강제적인 즉위 === 고려 말기 고려를 침공한 여러 외세를 무찌르면서 힘이 지나치게 커진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이인임]]과 고려 신하들이 별 수를 다 썼지만 패배했다.[* 다만 이인임은 고려말 최악의 권신 중 한 명이라서 이성계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오죽했으면 훗날 이성계와 대립각을 세우는 [[최영]]이 직접 주도적으로 나서서 이성계를 끌어들여 [[무진피화|이인임의 수족을 잘랐을 정도였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을 실각시킨 이후 고려에서 제일가는 권력자가 되어 [[공민왕]]의 아들이면서도 [[섭정]] 이인임을 아버지, 즉 '국보'라고 불렀던 [[우왕]]을 폐위하고 8세의 어린 세자 [[창왕|창]]을 대신 옹립했다. 하지만 혁명을 저지하려는 고려의 세력들이 창왕을 중심으로 결집할 낌새가 보이자 군주를 교체하려는 마음을 먹는다. 한편, 이성계를 따르는 [[조선]] 건국 세력은 [[선위]]를 통한 평화적인 왕조 교체를 원했다. 마침 새로운 군주로서 '''이성계와 [[사돈]] 집안이기도 한 정창부원군 왕요'''가 꼽혔다. 왕요의 동생 정양군이 이성계의 7남 [[무안대군|이방번]]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왕조 때 정양군(定陽君) → 정양부원군(定陽府院君)이 되었다가 조선 왕조 때 마전군 귀의군(麻田郡 歸義君)이 되었다. 사후 시호는 '경희공'(景禧公).] 게다가 정창부원군 부인 노씨는 이성계의 17촌 먼 친척이기도 했다. 공양왕이 단순히 이성계와 가까워서 즉위한 것은 아니었다. 얼자를 차별해서 계승권을 주는 대신 출가시켜 버리고, 적통 왕자들 중에도 출가자가 자주 나온데다 [[무신정권]]의 의중에 따라 폐위가 반복되면서 이미 귀해졌던 고려 왕실 직계는 [[원 간섭기]]에 원나라의 정치상황과 연동되어 더욱 줄어들었고, 자손 자체도 많이 줄었다. 제30대 [[충정왕]]이 숙부인 [[공민왕]]에 의해 제거되고, 제28대 [[충혜왕]]의 서자인 왕석기와 그의 아들이 제32대 [[우왕]] 즉위 직후 처형됨으로서 [[충혜왕]] 직계가 단절되고, [[창왕]]이 혈통을 부정당해 제27대 [[충숙왕]]-제31대 [[공민왕]]-제32대 [[우왕]]-제33대 [[창왕]]으로 내려온 계보도 끊어져 '''충''' 자 돌림 왕들의 직계가 끊어졌다. 고려 왕실과 대결했던 [[왕고(고려)|왕고]] 이후 [[심왕]] 자리를 계승해오던 [[정화궁주]] 왕씨의 직계 후손도 제3대 심왕 [[왕토크토아부카]]의 죽음으로 끊어진 상황에서 창왕과 부계 18촌, 모계 9촌인 공양왕은 왕위에 가장 가까운 왕족 중 한 명이었다. 덧붙여 모계 기준으로 [[정화궁주]]의 잔존한 유일한 후손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