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양왕 (문단 편집) === 이성계 견제 === >'''난[余] 평생동안 의식(衣食)과 사령(使令)이 모두 충분했다.''' >''' 그러나 이제 와서 부하(負荷)가 이리 막중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 - 《고려사》 <공양왕 세가> 중. -왕위에 오른 뒤 잠을 설쳐가며 불안해 했다.- 당시 정국은 [[태조(조선)|이성계]] 일파가 잡고 있어서 실권은 없었지만 공양왕은 이성계 일파에 대한 대항마로 [[이색(고려)|이색]]과 [[정몽주]] 같은 반([[反]]) 이성계파 인사들에게 주목했고, 그들을 이용해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여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했다. 치부에 힘쓴 배경 탓인지 우왕과 창왕 시절 [[토지]] 개혁을 추진했던 [[조준(조선)|조준]]과 [[정도전]]을 즉위 전부터 미워했던 탓도 있다. 이성계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우왕과 창왕의 처리 건이다. 연달아 군주 2명을 갈아치웠기에 명 태조 [[홍무제]]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의 처형을 조금 미루자는 입장이었으나 공양왕은 이들의 즉결 처분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래서 즉위 직후부터 그들에 대한 폄하 조치들을 시행하여 즉위 1개월여만에 우왕과 창왕은 빠르게 처형되었다. 이는 '''<폐가입진>'''의 명분을 강화시켜주는 조치였다. 공식적으로 역적인 창왕을 옹립했다는 정치적 약점을 잡힌 이색 대신[* 다만 그렇다고 이색 등을 홀대한 건 아니다. <폐가입진론>에 따라 우왕과 창왕을 옹립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했지만 관련자들을 유배보내는 선에서 그치고, 유명한 '''[[종계변무]]'''의 시발점이 되는 '''[[윤이·이초의 옥사]]'''에서도 이색 등을 옥에 가두면서도 비가 와 감옥이 잠길 정도가 되자 하늘의 뜻 핑계를 대며 풀어주었다.] 반 이성계 파로 돌아선 정몽주와 협력했다. 이성계와 같은 '''흥국사 9공신'''의 한 명인 정몽주가 공양왕을 지지해준다면 그의 정통성은 더욱 강해지며, 거물급 정객이기도 한 정몽주가 도당에서 버텨줌으로서 공양왕을 끌어내리기 위해 여론몰이와 공세를 취하는 이성계측 인사[* 특히 [[남은]]]들의 공세를 어느 정도 막아낼수 있었다. 1392년 이성계가 명나라에서 귀국한 세자 왕석을 마중나간차에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부상당했을 때는 이성계의 부재를 틈타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들을 모두 [[탄핵]]하여 [[귀양]]보내면서 이성계의 수족을 잘라 버렸다. 정몽주는 공양왕에게 치명타를 날릴 것을 계속 주문했지만 공양왕은 어물쩍거려 결정타를 날리지 않았다. 이는 공양왕의 권력기반과 관계가 있었다. '''[[이성계]]가 보위를 노리는 권신임과 동시에 공양왕의 권력 기반이기도 했다는 점'''이 공양왕의 딜레마였다. 이성계 일파를 몰아내면, 이성계의 사돈이자 그에 의해 옹립된 자신도 덩달아 쫓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의방]] 등 [[무신정변]]의 주역들에 의해 옹립된 제19대 [[명종(고려)|명종]]이 [[이의민]]의 죽음 이후 [[최충헌]]에게 폐위되었던 전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매체에서 이성계, 정몽주, 정도전 관계를 극적으로 재구성하느라 놓치기 쉬운 부분인데 정몽주는 정도전보다 훨씬 오래된 이성계의 핵심 막료로서 창왕 폐위 때까지는 쭉 행동을 함께한 인물이었다. 공양왕의 즉위 정통성을 흔들 수밖에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정몽주가 이성계 세력 일망타진을 권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둘은 고려 왕조를 지킨다는 큰 목적이 같아서 힘을 합친 것이지 이성계와 정도전, 조준처럼 절대적인 신뢰로 뭉친 관계가 아니었다. 고려를 유지하려 한다는 점만 빼면 정몽주 역시 이성계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으며 이성계가 꺾이면 새로운 권신이 될 사람이라고 공양왕이 생각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무엇보다 앞서 정몽주는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협조했다.[* 이성계의 우창비왕설에 가장 큰 힘을 실어준 자가 다름아닌 정몽주였다.] 그렇다면 '''자기 역시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공양왕이 정몽주를 신뢰하기엔 정몽주는 공양왕과 인연도 없고 이미 군주를 갈아치운 경력이 있었다. 게다가 1388년 [[위화도 회군]]부터 [[김저]], [[정득후]]의 우왕 복위 미수 사건(1389), [[윤이·이초의 옥사]](1390)로 이어지는 일련의 숙청 속에 고려의 군권은 이미 이성계 일파가 완전히 장악한 상황이었다. 이성계가 부상을 입었을 뿐 [[정종(조선)|이방과]], [[이지란]], [[의안대군(이화)|이화]], [[이제(조선)|이제]] 등 이성계의 막강한 군사력을 책임지는 친위무장세력이 건재했다. 정몽주의 요청을 받아들였다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만약 공양왕이 계속 밀어붙이고 자극하다가 이성계가 마음을 바꾸는 순간 군사력을 동원해서 왕조를 바꿔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까지는 않더라도 [[무신정권]] 시절이나 우왕과 창왕처럼 그냥 폐위시켜 버리고 다른 왕씨를 옹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공양왕으로선 어느 정도 세력을 꺾었으니 이 쯤에서 숨을 고르면서 세력 균형을 잡고 타협하는 노선으로 흐를 수 밖에 없었다. 어느 한 쪽을 완전히 궤멸시키지 않고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이유는 과거 [[우봉 최씨]] 세습 무신정권이 있었듯 이성계를 필두로 한 [[전주 이씨]] 세습 무신정권을 용인하고, 왕조는 보존하려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으로 어느 정도 설명된다. 다만, 이미 고려는 그런 애매한 방식으로 존속하기엔 너무 쇠락한 나라였고, 고려 왕실의 권위는 더 떨어질 수 없는 곳까지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성계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한 편이 아니었다. 5남 [[태종(조선)|이방원]]의 보좌를 받으며 이성계는 [[개성시|개경]]으로 돌아왔기에 결국 공양왕과 정몽주의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공양왕은 자신의 딜레마를 명나라라는 중원의 슈퍼파워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낙마사건이 일어나기 1년전에 세자 왕석을 명나라에 입조시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명나라에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도 보냈다. 공양왕의 심중을 뻔히 아는 이성계는 이에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대비인 [[정비 안씨]]로부터 <폐위 교서>를 받아내 공양왕을 폐위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