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양왕 (문단 편집) === 강등과 최후 === 1개월 뒤인 1392년 8월 7일, 폐주 왕요는 쓸쓸하게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오늘날 [[강원도]] [[원주시|원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간성군]](杆城郡)[* 오늘날 [[강원도]] [[고성군(강원도)|고성군]].]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는데[*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7일 병진 3번째 기사.] 이때의 유배지명를 따서 '간성왕'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간성군에서 총 2년간 있었는데 공양왕의 저항으로 촉발된 명분 부족은 곧 조선 건국을 주도한 유신들의 위기의식과 [[왕(성씨)|개경 왕씨]]들에 대한 지독한 경계심을 초래했다.[*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선 무장 출신 태조는 왕씨들에게 온건한 입장이었지만 유학자인 그의 공신들은 태조 즉위 과정에서의 명분 부족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해 이 건에 대해서는 정파 구분없이 똘똘 뭉쳤다. 이성계가 바랬던대로 가만히 도장이나 찍어주다 순순히 선양했다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한 [[꼭두각시]]가 될지언정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씨 사직을 위해 저항했고, 이것이 이성계의 즉위를 [[반정]]의 형태로 만들었다.] 1394년 1월에는 조선이 건국되고 [[수도(행정구역)|수도]]를 옮기기로 결정된 상태에서 [[부산광역시|동래]] 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이 [[맹인]] 점쟁이에게 왕씨 왕족들 중 누가 귀한 사주인가를 물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결국 [[대마도 정벌]]로 유명한 [[박위]]가 시킨 일로 점점 불이 커지더니 점쟁이가 말한 왕씨들도 옥에 갇히게 되었다. 태조는 적당히 벌을 주고 무마하려 했지만 결국 왕화, 왕거, 김가행, 박중질 등 모두가 [[참수형]]에 처해졌고 공양왕 부자의 명운도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다.[* 박위는 이때 이성계가 감싸 살아남고 [[관직]]도 계속 올라가지만 4년 후 [[무인정사]] 때 [[태종(조선)|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결국 조선 왕조는 1394년 3월 14일 공양왕과 그의 아들 2명을 오늘날 강원도 [[삼척시|삼척]]으로 다시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3014_001|유배시켰다.]] >'신민(臣民)들이 밀어붙여 나[予]를 군(君)으로 만드니, 참으로 천수(天數)였다. > >영(令)하여 군(君)을 관동(關東)에 머물게 하고 [[개성 왕씨|다른 동성(同姓)들]]은 알아서 편한 곳으로 가 생업(生業)을 하게 했다. > >지금 동래 현령(東萊 縣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이 불순한 짓을 도모하여 군과 친속(親屬)의 운명을 맹인(盲人) 이흥무(李興茂)에게 점치게 했다. > >일이 발각되어 죄를 물었다. 군은 비록 모르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대간법관(臺諫法官)들이 계속 장(章)을 올려 주청함이 12번을 넘기니, 매일마다 다투었다. > >'''대소신료들까지 또 상서하여 다투니 나[予]는 어쩔 수 없이 청을 물릴 수가 없어 따라야 한다. 군은 이를 알라!'''' >---- > - 《태조실록》 3년 4월 17일 병술, -공양군을 교살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4017_003|@]] 공양왕은 결국 폐위된지 2년 후인 음력 1394년 4월 17일, 삼척 고돌산의 살해치[* 오늘날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동막리와 근덕면 궁촌리로 가는 고개. 공양왕이 [[살해]]된 [[峙|언덕]]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공양왕릉과 지척간이다. 궁촌1리 마을회관 근처.]에서 중추원부사 정남진(鄭南晋)에 의해 왕세자 왕석과 함께 향년 50세에 [[교살]]되었다.[* [[사위]]인 우성범(禹成範)과 강회계(姜淮季)는 공양왕이 폐위되었던 1392년 7월에 참수당했다. 참고로 강회계의 형 강회백의 친손자가 조선 초 강희맹ㆍ[[강희안]] 형제다.] 1394년(태조 3년) '고릉'(高陵)의 능호가 붙여졌으며 원래 폐위 직후에 '공양군'(恭讓君)[* 살아 있을 당시에 이렇게 불렸던 것이니 [[시호]]라기보다 [[왕자]]들에게 부여되는 '[[존호|존호(尊號)]]'로서 부여된 것이다. 물론 [[사망]] 후에는 '공양왕'으로 추봉되기 전까지 그것이 그대로 시호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어차피 존호도 [[시법]]에 따라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법상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나 남에게 그 자리를 넘긴 사람에게 주는 [[글자]]들로 구성된 '공양'군도 여기에 해당된다.]으로 불리었으나 1416년(태종 16년) [[태종(조선)|태종]]이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608005_001|'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냈다. 현재는 [[왕비]]인 [[순비 노씨]]와 [[합장]]되어 있다. 이성계는 [[성왕(주)|서주 성왕]]이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 즉 [[제신]]의 이복형 [[미자계]]를 송나라의 공작에 봉해 [[상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을 본받아 공양왕의 동생이자 자신의 사돈인 정양군 왕우를 '''귀의군'''으로 봉해 고려 역대 군주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왕우는 이성계의 사돈이었기 때문에 그와 두 아들 왕관과 [[왕조(고려)|왕조]]는 왕씨 숙청 때도 무사할 수 있었으나, 왕우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이 일어났을 때 왕관과 왕조도 휘말려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