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영달 (문단 편집) == 생애 == 공영달은 574년 [[북제]]에서 공안(孔安)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영달은 8살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장성하면서 《좌씨전》, 《정씨상서(鄭氏尚書)》, 《왕씨역(王氏易)》, 《모시(毛詩)》, 《예기(禮記)》에 명석하였고, 아울러 역술과 산술에 뛰어났다. 공영달은 동향의 인물인 유작(劉焯)의 문하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처음에는 유작으로부터 무례한 대우를 받고 몇 가지 문답을 나눈 결과 유작의 문하생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유작의 밑을 떠났다. 유작의 밑을 떠난 뒤에 공영달은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공영달은 [[대업]] 연간[* 605년 ~ 618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하내군(河內郡) 박사로 제수되었다. 당시 황제였던 [[양제(수)|양제]]가 천하에 널린 유학자들을 소집하면서 공영달도 여기에 참가하였다. 당시 공영달이 으뜸으로 나오자 선배 유학자들은 공영달을 못마땅하게 여겨 자객을 보내 공영달을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양현감]]이 공영달을 숨겨준 덕에 공영달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뒤에 태학박사가 되었지만 당시 수나라의 정국이 [[양제(수)|양제]]의 실책으로 혼란해지자, 공영달은 전란을 피해 숨었다가 당시 당나라의 진왕인 [[이세민]]이 [[왕세충]]을 정벌할 때 공영달을 진왕부 학사로 천거하였다. 626년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황제로 즉위한 뒤, 공영달은 국자박사가 되었으며, 급사중으로 전임되었다. 공영달은 태종이 정무를 수행할 때 여러 차례 충언을 올려서 많은 예우를 받았다. 또한 632년에는 국자사업으로 제수되었고, 1년 뒤에는 태자우서자가 되고 국자사업을 겸임하였으며, [[위징]]과 함께 [[수서]]의 편찬에 참여하여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638년에는 국자좨주가 되고 동궁의 시강으로 임명되어, 태자인 이승건을 보좌하면서 [[우지녕]]과 함께 이승건에게 수차례 간언을 올리기도 하였다. 공영달은 643년에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났고, 648년에 세상을 떠나 태상경으로 추증되고 헌(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