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융 (문단 편집) === 효자가 불효죄로 처형당한 이유 === 공융이 불효죄로 처벌받아 그 삼대가 멸족당한 원인은 바로 그의 다음과 같은 발언 때문이다. > "아비가 자식에게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근본된 뜻을 논하자면 사실 (아버지의) 욕정(欲情)이 결과로 나타났을 뿐 아닌가? 자식 또한 어미에게 또한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비유컨대 병 속에 있던 물건을 꺼낸 것과 같을 뿐 아닌가?" >- 《[[후한서]]》 <공융전> 현대에야 할 수 있을 법한 주장을 1800년 전에 하였으니 공융의 이런 발언은 상당히 놀라운 면이 있다. 공융은 이렇게 효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을 던져 불효죄로 처형되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효자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왜 공융은 이렇게 말했을까? 공융 처형의 빌미를 제공한 이 말은 부모와 자식의 윤리를 전면 부정하며 [[효]](孝)[* 한나라 말기 시대의 예속농은 가난하므로.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고 그래서 이 시대 효행에 관한 에피소드를 모은 책들을 보면 무서운 이야기가 많다. 아들을 죽여 노모를 부양하려고 했던 부부 같은 즉, 국가 복지, 사회 안전망 작동이 불가한 상태에서 인민들에게 각자도생을 주문하고, 그걸 합리화하는 도구로 효(孝)가 오용되고, 이럴 경우 보통 가족 내부에서 가장 약한 계층[* 주로 자식과 여자다.]이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맹종]]의 죽순 일화 같은 건[* 물론 당대에도 원형이 된 이야기가 있겠지만 말이다.] 일종의 '가문 미화 설화'로,'이렇듯 효성 지극한 집안이라 하늘의 복을 받아 지금 같이 번성한 것' 이라는 논리로 퍼진 것인데 어머니께 드리고자 귤을 품었다고 효자로 칭송 받는 이(육적), 3년상을 2연타로 치뤄서 명성을 얻은 이(원소) 등이 있지만, 결국 그것도 권력자에게 초대받아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지위였기에, 6년 동안 생업 따위는 버려두고 몸을 고생시켜도 문제 없는 기반과 건강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결국 일반 백성들은 애초에 기회조차 없는 허례허식의 거품으로 자기들끼리 '효'라는 코인의 가치를 뻥튀기 시켜주고, 그것으로 통치의, 혹은 탈권의 정당성을 얻은 자들인 것이다.]에 대한 가열찬 비판을 담고 있다. 유교의 성인인 공자의 후손이 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공융을 죽일 꼬투리를 찾던 조조가 가장 사회적 공감을 받기 쉬운 죄목을 골라 잡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공융과 조조의 대립 관계에 대해 좀 더 초점을 맞춰볼수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공융은 조조의 '권력'을 공격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융이 끝내 용서받지 못한 것은, 그가 조조의 '권위'를 공격한 것을 조조가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조는 당대의 여러 명사들처럼 [[효렴]]을 통해 관직에 진출했고, 아버지 [[조숭]]의 참사를 갚는다는 명분하에 서주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 시대의 여러 야심가들과 마찬가지로 조조 역시 효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고자 했던 셈이다. 그전까지 조조가 싸워온 상대들은 [[황건적]], [[흑산적]] 등 반란세력 또는 무력을 기반 삼아 괴뢰를 세운 [[동탁]] 같은 부류들이었다. 반면 서주의 통치자 [[도겸(삼국지)|도겸]]은 엄연히 조정의 명으로 서주를 다스릴 권한을 얻은 공직자였으므로 조조의 서주 공격 및 학살은 그의 첫 일탈이자 사적 전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헌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공융의 효 해석이 결합하면 조조가 결코 달갑게 여길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공융에 의하면 효는 어디까지나 근친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이기주의에 불과하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그 어떤 윤리적 정당성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조조가 자신의 행동을 변호할 명분의 기반 또한 정당성을 잃는다. 결국 남는 것은 한에 대한 충성은 나몰라라 하고 영토 확장과 세력 경쟁에 대한 군웅들의 야욕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조조는 이러한 해석이 공융이 가진 명성에 힘입어 설득력을 가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공융은 자신의 발언이 단순한 변덕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헛소리가 아님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조조를 조롱했으며 그 논리의 원천은 대부분 경학에서 나왔다. 조조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분노와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이런면에서 공융이 참으로 적절한 지적을 한게, 실제로 효는 굉장히 타산적인 논리[* 사실 한나라가 오랜 세월 평화를 구가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비례하여 세력이 있는 가문의 수 역시 증가했고. 벼슬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사인들은 벼슬을 얻기 위해 가문과 인연에 의존하여, 가족끼리 벼슬을 점유하고(양씨, 원씨) 반대파를 몰아내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런 극악의 경쟁 분위기 속에서 명성을 떨쳐야 한다는 절박감에 스펙, 보여주기 목적에서 효행을 하는 사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효행이 엉큼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고 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효는 결국 '봉양의 의무를 진 자'가 '봉양의 혜택을 받는 자'로 자연 전환되면서[* 자식도 결국은 부모가 되니까 말이다.] 희생과 수혜의 대차를 맞추는, 결국 철저한 손익균형/순환의 시스템인데 반해,충은 한번 신하는 영원히 신하, 한번 군주는 영원히 군주로 못 박힌, 불변의 불균형 관계다. 결국 효와 충을 억지로 단일화 시키다 보면,신하가 '나는 내 의무 다했으니까 나도 왕 되보련다!' 라는,오히려 찬탈과 왕조 교체의 논리가 정당화 되는 것도 가능하다. 공융이 했던 문제의 발언은,이런 효자/역적들을 지켜보며 오랜 세월 내려온 이 모순된 충효관에 대해 나름 느낀 바가 많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은데,공자의 후손으로서 그가 이런 문제의식을 새로운 학설로 발달시켰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다시 말해 공융은 유교의 양대 덕목인 효와 충이 양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현한 셈이다. 전후 양대 400년을 합쳐 [[한나라]]를 지탱했던 사상[* 정확히는 후한 200년 시절에 유교의 힘이 다른 사상보다 더 강해진 것에 가깝지만 말이다.]인 유교를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세력이 받을 사회적 반감을 최대한 줄일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결과 발생한 것이 바로 효의 부각이었다. 이렇듯 윤리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는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던 공융은, 힘으로는 그들을 제압할 수 없는 대신 끊임없는 조롱으로 일관했다. 그저 한 개인에 불과했다면 무시당하거나 진작 제거되는 빌미를 마련했을 발언들은 공융의 명성을 뿌리 삼아 나름대로 질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공융은 젊은 나이에 이미 조정으로부터 복잡한 시선을 받은 사람이다. 후한 말 대장군 [[하진]]은 공융의 탄핵을 받자 무사들을 시켜 그를 암살하려 했다. 헌데 빈객이 공융의 명성이 높은데 그를 죽였다간 사방의 사대부들이 등을 돌릴 것이 우려되므로 차라리 회유책을 쓰는 것이 낫겠다고 진언하여 받아들여진 사건이 있었다. 조조가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공융을 굳이 끌어안은 것 또한 반대 세력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에서 나왔을 터이나, 정작 그 공융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규합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늘릴 판이 되는 것을 좌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융이 멸족을 당한 것은 다름 아닌 공융 자신이 조조에게 갖는 존재 근거에서 기인했다는 이야기가 된다.결국 조조는 구현령으로 인재를 선발할때 불인불효를 외쳤으나 정작 당대의 명사 공융은 불효죄로 죽인 꼴이 되었다. 공융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식으로 조조에게 엿을 먹였으니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후일 조조의 후손 [[조모(삼국지)|조모]]가 천자의 지위를 잃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근거는 그가 불효자라는 조작된 사실에서 나온 것이다. 이로써 조모는 죽은 뒤에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여 시호조차 없게 되었다. 신하가 황제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최대 최악의 불충조차 황실의 어른에게 불효했다는 사실에 눌려 가려지고 또 그것이 정치적 필요의 당위를 얻었다는 이 기막힌 사건은, 생전의 공융이 무엇을 경계하고 또 무엇을 적대하고자 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상이 사상으로 남지 않을 때, 정치적 필요에 따라 변질되고 오용될 때 그것은 창칼 못지 않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대적하기 어려운 무기가 될 수 있다. 물론 공융은 사상이 사상 그 자체로 남을 수 있도록 지키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 자신이 직접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사상을 무기로 삼아 행동한 것에 가까우며 그 결과 일가가 함께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조조 또한 공융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굳게 세운 효의 불가침성으로 인해 살해당한 자손이 오히려 죄인이 되고 찬탈을 당하는 역사의 비극을 낳았다. 이상의 사실을 토대로 볼 때, 공융을 순수한 철학자로 보기 어렵다는 관점은 공융 자신의 정치적 행적에서 직접 드러나므로 정당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쟁에 이념이라는 요소가 깊게 침투해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공융의 주장과 그의 삶은 정치와 사상, 윤리도덕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정면 반박인 셈이다.[[http://neight_nesia.blog.me/221060505383|출처: 강명의 삼국지 - 충과 효에 대한 세 가지 질문]] 학문적 관점으로 보면 후한말쯤 가면 이미 [[동중서]]가 확립한 유교적 패러다임에 대드는 것은 노자나 장자를 공자보다 확연히 아래인데 공자가 미처 얘기하지 않고 지나간 부분에 대해 얘기했다는 식으로 슬그머니 끼워넣는 게 가장 성공한 시도. 공융이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는지 명확하게는 파악되지는 않지만 그 방향성만으로 볼 때 그 문제의식을 개개의 사례가 아니라 하나의 학문으로 설립한다는 건 공융의 학자적 능력이 동중서가 아니라 [[주자(철학자)|주자]]급이라도 무리수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우리 아빠나 엄마가 나쁜 놈이면 어떻게 합니까?' 에 대해서 [[공자]]가 명확한 답을 내린 바 있기 때문에 어지간히 교묘하지 않으면 학설로 정립해 보려는 순간 공융의 사회적 학자적 생명 - 디 엔드일 가능성 다분하다. 유교의 지배적 위치와 충효에 의한 통치 체제 자체의 개혁을 논하는게 아니라 그 교리의 다양한 해석적 측면에 대한 얘기이다. 유교,특히 초기 유교는 우리가 조선시대 주자 해석 조금 바꾸면 죽일 놈 취급했던 것 처럼 철두철미 불변의 도그마를 뿌리내린 학문이 아니었고 항상 새로운 해석과 변용을 받아들이며 성장해 나갔다. 실상 후한 말~삼국시대 유교는 이미 동중서 시절의 유교와는 크게 다른게,애시당초 동중서 시절에는 금문 뿐이었지만,이 시기에는 정현에 의해 고문 중심의 금고문 통합이 이루어졌으니 근본 텍스트 자체가 다르다. 더군다나 동중서 등이 관학화 한 유교는 먼치킨 급으로 막강한 황제들(무제/광무제) 비호 아래 황제 폐하 짱짱맨 수준의 어용학문으로 시작한 거고, 실제 학술적/철학적/사회윤리학적 측면 보다는 음양오행이나 참위 등 공자가 보면 '이게 무슨 개소리야!' 싶을 오컬트 요소가 지나치게 부각된,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과는 많이 다른게 그 시대의 유교였다. 후한 말~삼국시대가 유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정현(삼국지)|정현]]에 의해 근본 텍스트가 정리되고 [[하안]], [[왕숙]], [[왕필]] 등에 의해 유교의 철학적 저변을 넓히는 시도가 있었으며 그동안 입으로만 읊어대던 충과 효를 현실의 난관 속에서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실천적 측면에서의 시험을 거치며 그 진정한 가치가 연마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적 진화와 격변의 시기에,공자의 후손이면서 현실 정치가 이기도 했던 공융이 한가지 더 기여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안 들수는 없는 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