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융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그의 7대조 공패(孔覇)[* 공자의 13세손이다.]는 원제(元帝)의 스승이 되었다가 시중으로 승진했다. 고조부인 공상(孔尙)은 거록태수를 역임했고, 아버지 공주(孔宙)는 태산도위를 역임했다. 공융은 아버지 공주의 7형제 중 여섯째 아들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자유분방하였고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천성이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유년기부터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가 4살 때였다. 형과 함께 배를 먹는데, 그가 언제나 작은 조각을 먹자 사람들이 이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어린 사람이 작은 것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도성으로 가게되었는데, 그가 도성에서 만난 당시 청류파의 수장이자 하남윤[* 속한서에는 하남윤이지만 세설신어에는 사례교위다.]을 지낸 이응(李膺)과의 대화는 유명하다. >10여 세의 공융은 이응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이응의 문도가 되려고 했다. 이응의 집에 도착한 공융은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군(李君)의 가문과 통했던 사람의 자손이오." >이응이 공융을 만나서 이렇게 물었다. >"고명하신 그대의 선군께서 일찍이 나의 가문의 조상과 교제를 하신 적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저의 선군이신 공자와 군의 조상이신 [[노자#s-2|이노군(李老君)]]께서는 덕과 의를 나란히 하셨으며, 함께 사우로 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저 공융의 가문과 이군의 가문은 대대로 서로 통하는 집안입니다."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기이한 동자라고 했다. 태중대부 진위(陳煒)가 나중에 도착했다. 같이 앉아 있던 사람이 공융과 이응의 대화를 알렸더니, 진위는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총명한 애가 커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답니다." >그러자 공융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군께서도 어렸을 때 총명하셨겠습니다.”''' >당돌한 어린 공융의 말에 진위는 결국 꼬리를 내렸고, 이응은 크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명하고 장대하니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입니다." 공융은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어 [[삼년상]]을 지냈는데, 지나치게 열심이었다. 덕분에 그는 사람이 부축하지 않으면 똑바로 서지 못할 만큼 건강을 해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공융의 대단한 효심에 감탄했다. 유가적인 관념이 절대적이었던 당시에도 삼년상은 육체적으로 힘들어 후한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약식으로 지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삼년상을 지내던 상주가 그 고행에 지쳐 죽어 줄초상이 나도 주변에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였다고. 그만큼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삼년상을 유가의 규율대로 철저하게 지내는 사람은 덕성을 갖춘 뛰어난 인물로 칭송받았다. 삼년상을 두 번 연속 6년 동안, FM으로(!) 지낸 [[원소(삼국지)|원소]]가 괜히 명성이 높았던 게 아니다. 더욱이 공융의 나이가 겨우 13세였기에 그가 지낸 삼년상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그가 16세가 되는 169년에 공융의 형인 공포(孔褒)의 친구인 [[장검#s-2|장검(張儉)]][* [[강하팔준]]과 [[후한삼군팔준|팔급]] 중 한 명이다.]이 당대의 권력자였던 중상시 후람의 비리를 고발했으나 오히려 모함을 받고 공포에게로 도망쳤는데, 당시 공포는 부재 중이었고 공융이 집에 있었다. 이 사건은 곧 2차 [[당고의 금]]과도 연결되었던 엄청난 일이었는데, 장검은 공융이 어렸으므로 상황을 모르리라 생각하여 사정을 이야기 하지 않은 채 떠나려 했지만 공융은 이를 눈치채고 형 대신 장검을 숨겨주었다. 나중에 공융이 장검을 숨겨준 일이 발각되자 장검은 도망쳤지만, 공융과 공포는 이에 대해 조사를 받기 위해 체포되어 송치되었다. 체포될 적에 공융은 자신이 장검을 받아들였으니 공포는 이 일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공포는 장검이 찾아온 사람은 자신이니 공융과는 무관한 사건이라 주장했다. 담당 관리가 누구를 죄줄지 정하지 못하고 공융 형제의 어머니에게 아들 중 누구를 죄줄지 묻자, 어머니도 집안 일은 주인이자 어른인 자신의 책임이며 두 아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토록 서로가 자신이 책임지고 처형받겠다고 다투는 전례 없는 일 때문에, 결국 군국에서는 판결을 못 내려 끝내는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 결과 공포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라는 조서가 내려왔고 공융은 살아남았다. 이와 같은 일화로 공융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