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작(작위) (문단 편집) ==== 역사 ==== 상기하였듯 DUX는 1차적으로는 지도자를, 로마 관료의 뉘앙스에선 한 지역의 군단장 혹은 그 직속 상관의 칭호였다. 즉 단어 그 자체는 무관에 한정하지 않지만,[* 중세 초의 라틴어 성경인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 성경에서도 Dux는 '지도자'란 의미이다.] 관료적 뉘앙스에선 군권의 장악을 의미하였는데, 때문에 서로마의 붕괴 후 게르만계 지도자들에게 작위명으로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설치한 관직으로서 DUX은 엄연히 문민 행정과 분리된 무관이었다. 민간 행정은 PRAEFECTUS, Vicarius 등 다른 행정 관직들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파리 대백작 위그[* [[카페 왕조]] 초대 왕 [[위그 카페]]의 아버지다.]가 자칭한 DUX ET PRINCEPS DE FRANCORUM([[프랑크 왕국|프랑키아]]의 지도자이자 영도자)는 위그 카페가 섭정으로서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장악한 동시에 군권도 장악했다는 의미로 사용한 칭호이다. 이때만 해도 공작은 특정 지역을 장악한 영역 제후의 의미는 아니었기에, 이 때의 DUX는 공작으로 번역해선 안된다. 게르만계 통치자들이 [[고대 로마]]의 관직을 자칭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우선 구 로마 제국령에 나라를 세운 경우 고대 로마의 행정체계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였던 점이 있고, 동시에 로마인이나 로마화한 현지인 유력자들과 융합이 용이해서 그랬던 점도 있다. 특히 독립 세력을 보유할 정도라면 (그것이 부족 단위 귀화든 동맹(foederati)이든 간에) 대개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 경우가 많아서, 제국 정부에서 실질적으로도 해당 역할을 수행하도록 기대하고서 관직을 임명하고는 하였다. 특히 DUX가 단순한 자칭 칭호로 여겨지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서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국왕 다음 격의 지위의 작위로 공식화 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게르만 대족장들에게 '[[헤르초크|Herzog]]'라는 관직을 수여한 예에 따른 것인데, 'Herzog'라는 칭호가 고대 게르만족에서 '부족을 전쟁터로 이끌고 나갈 지도자로 선출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던 'Harjatugô'에서 유래한 것이었기에, 이것이 라틴어로 번역될 때는 고대 로마의 'DUX'로 번역되는 것이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후일 [[신성로마제국]]에 [[선제후]]가 제정된 이후에 선제후의 다음가는 작위의 격으로 Herzog를 규정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이렇듯 공작들은 대부분 기존의 지역 유력자들이 임명된 것이었다. 독일의 경우 [[부족 공국]]들이 그러했고, 프랑스의 경우 로마화가 많이 진행된 남부 지역에 공작이 임명되었다. 대표적으로 [[서고트 왕국]]의 영토였던 아키텐 지방은 기존 서고트 출신의 유력자들이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되었고, [[부르군트 왕국]]의 영역이었던 부르고뉴 역시 공작으로 임명됐다. 로마화가 많이 진행된 지방인 프로방스와 툴루즈는 각기 행정관(프라에펙투스)와 대관구장(patrician)으로 임명되었는데, 하는 역할은 비슷했다. 문제는 애초부터 지역 유력자를 형식상 관직에 임명하다보니, 공작들은 자기 부족 세력을 기반으로 권한을 행사하였고 자연스레 영역제후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위그 프랑스 공도 실제로 권력을 발휘한 것은 북프랑스 일대[* 구 [[네우스트리아]] 지역. 프랑스 왕의 남부 영향력이 얼마나 적었는지, 프랑스 공이라는 칭호를 구 네우스트리아 지역에 대한 영역제후령에 대한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북프랑스 = 프랑스 공국이었다는 관점이다.]뿐이었고, 남부의 아키텐 공의 지역이나 동남쪽의 부르고뉴 공이 장악한 지역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못했다. 결국 제국의 장악력이 약화되는 10세기까지 자연스럽게 부족적 관습법을 따라 '장군'이라는 관직이 세습재산화 하였고, 곧 지역 [[영주]]로 변하게 된다. 어휘 자체는 여전히 DUX지만, 그 의미가 영주인 공작으로서 작위로 변한 것이다. 그나마 신성로마제국은 교황의 권위로 황권이 유지되어서 각 공작에게 재판권을 주지는 않아서 별도로 황제가 통제하는 백작(재판관)을 파견했지만, 프랑스는 카페 왕조 자체가 저 유력 제후들이 추대한 탓에 권위도 바닥을 기었고, 따라서 프랑스는 초기에는 왕권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왕으로서 봉신을 부린다기보다는 평등한 동료나 동맹에 가까운 형태로 동원했다. 프랑스의 경우 당연하게도 넘사벽으로 커다란 영역을 먹고 있던 아키텐이나, DUX FRANCORUM 등의 선례를 따라 자연히 공작(DUX)이 최상격으로 간주되었고, 공작들도 자체적으로 행정관으로써 임명하기도 했던 백작위는 공작보다 하위로 간주되었다. 다만 이러한 정립은 좀 더 후대의 일이고, 진짜 중세 프랑스 왕국 시대에는 왕의 직속 봉신인 백작이면 공작에 특별히 꿀리지 않고 '(프랑스)왕의 동료(peerage of france)' 라고 해서 가장 명예로운 직위로 있었다. 샹파뉴 백작, 플랑드르 백작, 툴루즈 백작 등이 이러한 왕의 동료에 들어서 공작과 대등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다만, 여기 예시를 든 백작들은 사실 왠만한 공작급이었다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툴루즈 백작의 경우 아키텐 공작에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넓은 영지를 보유했지만(둘이 프랑스 남부를 양분해서 가지고 있었다...) 가문의 급이 딸려서(?) 백작을 칭했고, 플랑드르 백작과 상파뉴 백작도 왠만한 공작급이었다. 중세 초기를 구현한 크킹에서 괜히 이 세개를 모두 공작으로 구현한 것이 아니다. ] 봉건 사회가 차츰 안정을 찾자, 독일의 부족공작들은 황제의 견제를 받아 차츰 해체되어 작은 규모의 공작령과 백작령, [[주교후]]령 등으로 해체된다. 반면 프랑스는 기존 영역 제후들의 후사가 끊기면 직할령으로 흡수하거나 [[일 드 프랑스]] 왕령지의 부유함을 기반으로 꾸준히 돈을 주고 영지를 사들이는 정책을 취했기에, 여러 백작령을 묶어 공작령을 신설하고 방계 왕실 가문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 (발루아 백작가), [[부르봉 왕조]] (부르봉 공작가)가 이렇게 생겨난 가문이다. 유럽이 중앙집권사회에 접어든 이후로는 공작의 힘이 그리 크지 않은 나라가 많았다. 근세 이래 유럽사에서 중앙 실세 귀족은 [[백작]]이 대부분이었다(웬만한 재상이나 대신은 대개 '백작'). [[후작]]은 오늘날로 치자면 국경지대 야전사령관이라서 중앙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독립적 세력에서 기원하였던 공작은 그 권력이 막강하였기에 역설적으로 [[부족 공국|군주와의 투쟁이나 집요한 견제 끝에 몰락하였고]], 왕족으로서 공작인 경우도 혈통 상 충분히 왕위 찬탈을 일으킬 명분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서, 국왕이 상식적이라면 공작들에게 많은 사병과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 따라서 근대 유럽의 귀족들은 차츰 그 자신이 지방세력으로 남기보다는 왕권에 협력하면서 중앙정부에서 한 몫 차지하고 때로는 국왕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게 된다. 결국 근세에 접어들면서 왕족이나 그에 준하는 오래된 가문만이 아니라 일반 귀족이나 심지어 기사들조차 공적이 높을 경우 승격하여 공작위를 받게되는 경우도 생겼다! 이는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감에 따라 발생한 현상이다. 또한 토지와 다른 재산이 귀족 '''작위'''에 따라붙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소유하는 것으로 여겨짐에 따라 공작위의 성격은 점점 변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왕족이 아닌 노퍽 백작이 노퍽 공작으로 승작하거나 [[존 처칠]]이 다대한 전공을 쌓으면서 기사에서 말버러 공작까지 승작한 것, 그리고 나폴레옹을 꺾은 아서 웰즐리 역시 웰링턴 후작부터 시작하여 웰링턴 공작, 워털루 대공 등으로 임명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럽 각국의 국왕들로부터도 수많은 작위를 수여받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Duke_of_Westminster|웨스트민스터 공작]] 같은 경우는 아예 그 시조가 평민 출신이다.[* 1622년 [[준남작]] 작위 획득 → 7대 만인 1761년 [[남작]], 1784년 [[백작]] → 1대 만인 1831년 후작 → 3대 만인 1874년 ~~대망의~~ 공작.] 즉, 공작, 정확히 작위제도의 의미는 작위 그 자체가 권력이나 특권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높은 영예를 누리는 직위로 성격이 변하였다.[* 물론, 작위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기 때문에, 마지막 비왕족 공작위 수여도 1900년으로 이후엔 수여가 안되고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에는 나폴레옹이 상당히 많은 인물들에게 공작위를 수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