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제(동진) (문단 편집) === 참척과 폐위 === 유유는 그 후 사마덕문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사람을 보내 죽였다. 사마덕문은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봐 두려워해서 항상 저씨(저영원)와 같이 있었다. 그들은 침상 앞에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었으며 그 비용은 모두 저씨가 부담했다. 그래서 유유는 손을 쓰지 못하다가 이듬해 9월, 저비의 오빠 [[저유지]]와 [[저담지]] 형제에게 영릉으로 가서 저씨를 만나게 했다.[* 저유지 형제는 황실의 외척이었으나 오히려 유유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 저씨는 별실에서 그들을 만났고 유유가 보낸 병사들은 그 틈을 타서 담장을 넘어가 사마덕문에게 독약을 먹으라고 강요했다. 이에 사마덕문은 불교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내세에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으니 그냥 죽이라고 태연히 말했고 병사들은 그의 아버지 [[효무제(동진)|사마요]]와 같은 방법으로 그에게 이불을 덮어서 질식사시켰는데 그때의 나이가 36세였다. 11월에 충평릉에 안장되었으며 유유는 백관을 이끌고 장례 행렬을 바라봤다. [[사마염]]이 [[조환]], [[유선(삼국지)|유선]], [[손호]]를 살려 주고, [[조비]]가 [[헌제]]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기반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고, 선양하는 군주들이 [[암군]] 또는 [[폭군]]이었거나 이미 허수아비 상태였기에 폐위된 이후에도 아무런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유는 그만한 기반을 갖지 못했고, 사마덕문이 허수아비도 아니었던데가 능력 및 인격면에서도 좋았기에 인망을 모으기 매우 쉬웠다. 때문에 유유는 두 황제를 죽이는 오명을 쓰더라도 자신의 후계를 지키기 위해 사마덕문과 사마씨를 몰살시키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후 왕조들이 선양으로 바뀔 때마다 살육이 벌어지는 끔찍한 레이스의 시작이 되었고, 이는 [[북송]] 대에 이르러서야 멈추게 된다. [[자치통감]]의 주석을 단 [[원나라]]의 호삼성은 유유의 증손자인 유송의 [[순제(유송)|순제]] 유준의 말로를 보고 '이후부터 선양을 한 전임 황제가 생명을 건진 사례는 거의 없었다.'라고 주석을 달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