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외 (문단 편집) === 현대 우리나라 === 1950년대 때부터 시작되어 60~70년대에 크게 유행한 대학생 과외 형태는 '''입주 과외'''였다. 학생의 집에서 하숙 겸 상주하면서 수시로 공부를 봐주는 형태였다. 입주 과외를 통해 등록금+하숙비+용돈을 해결할 수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입주과외비를 2011년 물가로 환산하면 월 150만원 가량 된다고 한다. 1960년대 비평준화 시절, 대도시인 서울과 부산에서는 명문 중고교에 진학하기 위한 '''[[초등학생]], [[중학생]]들의 입시 전쟁'''이 과열되면서 과외 등 사교육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과거에는 [[중학교]]도 입학 시험이 존재하였고, 명문 중학교에 입학하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1960년대에는 경기중에 입학하면 경기고에도 거의 그대로 진학했고, 당시 경기고에 들어가면 서울대나 연고대에 거의 합격했었다. 때문에 경기중학교에만 들어가면 SKY는 거의 보장된 상황이었고 때문에 중학교 입시가 치열했다. 하지만 중학교 입시는 통학 거리의 한계가 있어 지방으로는 파급되지 못했고, 서울과 당시 6.25를 통해 서울 못지 않은 대도시로 성장한 부산 정도가 특히 치열했다. (1960년에 서울과 부산 인구가 각각 200만명, 100만명을 동시 돌파했다.) 초기에 이런 중학교 입시는 주로 과외가 담당했으나 1950년대말 서울 종로에 입시학원들이 생겨나면서 60년대부터 학원들이 성업하였다. 60년대 중학교 입시가 너무 과열되면서 학원과 과외가 횡행하였다. 특히 60년대에는 '''현직 교사들'''이 공무원 신분으로 불법적으로 과외를 하여 사회 문제가 되었다.[* 처벌 규정에도 불구하고 일부 현직 교사들이 과외에 나선 것은 1980년대까지 교사 봉급이 상당히 박봉이었던 탓도 있었다. IMF 이전에는 민간 대기업도 정년이 상당히 보장되는 편이어서 박봉이었던 교사직은 지금과는 달리 비인기 직종이었다. 1990년대 이후 교사 봉급이 많이 오르면서 민간 기업과 연봉 격차가 많이 줄어들게 되어 이런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또 중학교 재수생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연고대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경기중을 비롯한 명문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60년대말 서울에만 13살 중학교 재수생이 연간 6천명이 넘었다... 결국 정부는 1968년 7월 15일 교육개혁을 단행하여 '어린이를 입시 지옥에서 구하자'며 중학교 평준화 정책을 실시했다. 이 정책에 당시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던 6천여 재수생들은 멘붕에 빠졌지만 대다수의 어린이와 학부모들의 폭발적인 환영을 받았다. 1969년 서울특별시에서 중학교 입시가 폐지된 것을 시작으로 1970년에는 부산직할시· 대구시· 광주시· 대전시 ·인천시 ·전주시로 확대되었고, 1971년에는 중학교 입시가 대한민국 모든 지역에서 폐지되었다. 하지만 중학교 입시가 사라지자 이번엔 고교 입시가 치열해졌다. 60년대까지는 경기중에 들어가면 거의 경기고까지 스트레이트로 가는 식이었기에 중학교 입시가 치열했고 고교 입시는 상대적으로 치열하지 않았다. 이후 [[중학생]]들의 고교 입시 전쟁이 지나치게 과열되자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1974년대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전격 시행했다.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연합고사를 실시하여 연합고사 성적으로 뺑뺑이 돌리는 방식으로 학교를 배정하는 고교 평준화 정책이 본격 시행되었다. 평준화 실시 이후 명문고를 가기 위한 중학생들의 입시 전쟁은 크게 완화되었지만 이제는 대학 입시 경쟁이 과열되었다. 70년대 입시 과열을 잡기 위해 평준화가 순차적으로 실시되었지만 국민소득 향상으로 교육열은 높아져 갔다. 74년 고교 평준화로 학교 수업이 중위권 학생 기준으로 이루어지자 명문대 본고사를 준비하던 상위권 학생들을 중심으로 과외가 성행하게 되었다. 과외 공부만으로도 부족해 과외공부의 복습을 시켜주는「새끼과외」, 입시를 앞두고 집중지도를 받는 「반짝 과외」, 어느 한 과목을 집중적으로 파는 「소나기과외」 등 갖가지 형태의 과외가 생겨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40833#home|#]] [[1979년]] 1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정의 사회 구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서민층의 지지를 얻기 위한 유화 정책으로 [[1980년]] 7월 30일, 전격적으로 '''[[과외]]를 전면 금지시켰다.''' 이 정책은 당시 국민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았지만, 과외 하나로 생활비, 학숙비, 등록금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었던 명문대생은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엄청난 불만을 가졌다. 이것이 유신 정권 때만 해도 비교적 잠잠하던 대학생들이 1980년 이후 학생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한 원인이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전두환 정부는 과외를 금지한 대신에 TV에서 교육방송을 실시했다. 이미 전두환 정부는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사교육 금지를 위한 방안을 고심했고, 1980년 4월 KBS에 과외를 대신할 교육방송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KBS에 교육방송국이 승격 편성되었고, 이광용[* 성문종합영어, 맨투맨종합영어와 함께 80~90년대를 풍미했던 영어의 맥의 저자 바로 그 사람이다.], 채영기 등 당시 최고의 1타 강사들을 섭외하여 1980년 6월 첫 방송을 시작했다. 당시 KBS 교육방송의 반향은 엄청나서 교재가 품절되어 난리였고, 교육방송 때문에 비수기에 TV 판매량이 두배나 급증하였다. KBS [[교육방송]]은 이듬해인 1981년 별개의 채널로 독립하여 [[KBS 3TV]]이 되었고, 나중에 [[EBS]]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당시 정부는 과외하다가 적발되면 면직, 구속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사용했다. 실제로 당시 과외하다가 적발된 학부모들이 면직되었다. 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과외가 완전 금지였던 적은 전두환 정권 전반기 몇 년 정도의 일이고, 그 이후로는 점차 과외 단속이 느슨해졌다. 그러나 정부의 과외 금지 조치에도 비밀 과외가 성행했고, 게다가 과외가 비밀 과외 형태로 음성적으로 진행되면서 단속반을 피해야 하는 위험 부담이 가격에 고스란히 반영돼 과외비가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었다. 1986년 대법원은 “지식을 교습하는 행위는 반사회적이거나 반국가적인 불법한 내용이 아닌 한 제한할 수 없다”는 학습권 존중 판결을 내렸다. [[1989년]] 2월 [[대학생]] 과외가 전면 허용되었다. 대학생이 아닌 일반인은 여전히 과외가 금지였으나 유명무실했졌다. 90년대부터 몇만원짜리 동네 과외서부터 고액 과외까지 성행하게 되었다. 사문화된 일반인 과외 금지 규정도 해제되었다. 그리고 2000년 4월 말 [[헌법재판소]]에 의해 1980년대 시행되었던 과외 금지 조치에 대해 위헌 판결이 나면서 앞으로 과외가 규제될 일은 없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