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테말라 (문단 편집) == 역사 == [[마야 문명]]이 번성했던 곳이다. 과테말라라는 이 나라의 국명도 '나무의 땅'을 의미하는 [[마야어]] K'iche'에서 왔다고 추정한다. K'iche'와 같은 의미의 나와틀어 Cuauhtēmallān가 변하여 과테말라(Guatemala)라는 이름이 되었다. 마야 문명은 대게 [[멕시코]] 남부 지역에 많이 지분이 있어 멕시코 문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잉카 문명]]이 [[페루]], [[에콰도르]]와 [[칠레]], [[콜롬비아]], [[볼리비아]] 심지어 북부 [[아르헨티나]]까지 공유했던 것과 같이 마야 문명도 멕시코 남부는 물론 이 나라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벨리즈]], [[온두라스]], [[니카라과]]가 공유하던 문명에 속한다. [[16세기]] 초 [[스페인인]] [[콩키스타도르]]가 도래하여 3세기에 걸친 스페인 [[식민지]] 시대가 시작했다. 콩키스타도르는 도시를 건설하고 이민자를 유입하며, 우호적인 부족을 끌어들여 적대적인 부족을 정벌하는 등 식민지배의 기틀을 차근차근 다져나갔다. 과테말라는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식민지배의 중심지로 과테말라 도독령의 중심지도 과테말라 중부의 [[안티과과테말라]]였다. [[1821년]] [[스페인]]에서 독립한 이후 잠시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와 함께 [[멕시코 제1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823년]]에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República Federal de Centroamérica)을 구성했다. 그러다가 [[1838년]] 연방이 해체되면서 별개 국가로 독립했다. 물론 프란시스코 모라산 등 [[자유주의]] 세력이 연방 부활을 시도했으나 라파엘 카레라 등 보수주의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으로 실패했고 과테말라의 독립은 확고해졌다.[* 이외에도 멕시코의 병합 시도를 물리치는 등 과테말라의 독립에 관한 카레라의 업적은 확고하다. 여담으로 카레라는 [[메스티소]]인데, 그래선지 후일 자유주의자들에 비해 원주민들에게 관용적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과테말라의 주요 산업도 기존의 인디고 재배에서 커피 재배로 점점 변화했다. 이후 1871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자유주의자들은 커피 재배를 더더욱 확대하고 원주민 공동체 소유의 토지를 몰수하여 독일인 이민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세기 말부터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간섭하였으며 과테말라도 그런 국가 중 하나였다. 현지 지배자들의 지원 하에 미국 기업들은 과테말라로 진출하여 각종 이권을 차지했다. 심지어 [[1940년대]]엔 미국이 현지 주민 5,500여 명에게 매독 생체실험을 한 적이 있다.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했지만, 과테말라 정부는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 중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의 나라 땅에서 생체실험을 버젓이 한 행동인지라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 항목 참조. [[1951년]]에는 [[토지개혁]]을 공약하고 당선된 민주정부로 인하여 미국계 과일회사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이권이 빼앗길 것을 우려한 [[미국 중앙 정보국|CIA]]는 군부세력을 지원하여 민주정부는 [[쿠데타]]로 무너지고 만다. 이 나라의 쿠데타 실상을 보고 [[체 게바라]]는 미국에 대해 본격적인 환멸감을 키웠다고 한다.[* 이 쿠데타의 뒤에는 [[에드워드 버네이스]]라는 [[프로이트]]의 [[조카]]이자 광고계의 거물이 있는데, 워낙 심리를 이용한 선동 능력이 뛰어나 미국인들의 식단을 기름진 [[베이컨]]으로 뒤덮고 여성의 흡연을 [[자유의 횃불|여성 해방의 상징]]으로 포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괴벨스]] 역시 그의 방식을 배웠다거나, [[아돌프 히틀러]] 본인이 그를 섭외하고 싶어했다는 루머까지 있다. 그는 당선된 과테말라 정부 인사들의 말을 분석했더니 공산주의자들이 자주 쓰는 말이라 하여 과테말라를 공산주의 전초기지로 낙인 찍어버렸다.] 이 상황을 이른바 [[과테말라 내전]]이라고 하는데 과테말라는 이후 [[1960년]]부터 [[1996년]]까지 무려 36년간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시작부터 과테말라에서 뭐든 맘껏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미국이 자기네 국적 식품회사 이권 지키려고 시작한 쿠데타가 뿌린 씨앗이었으며 그런 만큼 더 처절했다. 민주파는 어떻게든 합법적 선거로 얻은 권력을 되찾아야 했고 유감스럽게 미국이 지원해주는 군부는 전혀 민주파에 권력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부의 힘이 더 셌다. 과테말라 내전이란 군부 출신인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이 1951년에 혁명행동당(Partido Acción Revolucionaria)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농지개혁(그것도 토지의 무상몰수가 아니라 유상매입 방식으로!) 등의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문제는 과테말라에서 대규모 플렌테이션을 운영하던 미국 [[유나이티드 프루츠]] 사의 농장을 국유화했다는 점이다. 유나이티드 프루츠 입장에서 아르벤스가 내세운 매매가는 너무 낮았다.[* 1차 수용 당시 아르벤스는 62만 7,572달러(2023년 현재 726만 달러)를 [[채권|장기채]]로 지불했지만, UFC는 1,935만 5천 달러(2023년 현재 2억 2,390만 달러)를 현금으로 내라고 주장했다. 서로간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2차 수용으로 또다시 토지가 대거 몰수되자 UFC는 본국 정부에 반 아르벤스 쿠데타를 사주하기에 이른다.][* 이렇게까지 매매가 차이가 극심한 이유는 유나이티드 프루츠가 탈세를 위해 (...) 후려친 신고가를 아르벤스가 그대로 매매가로 불렀기 때문이다. 즉 서류상 기재된 제 값 내고 사겠다는 건데도 뺀찌 놓다가 쿠데타나 일으켰다는 것 --혐성질 한 번 잘 한다--] 아르벤스의 개혁을 목격한 [[아이젠하워]] 정권은 미국의 이익에 반(反)하며 미국 주변의 공산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해 아르벤스 정권을 공산주의 정권이라 간주하고 [[쿠데타]]를 시도했다. 미국은 군과 정부 내부의 반 아르벤스파를 결속시킴과 동시에 [[미국 중앙 정보국|CIA]]에서 추진한 일명 "PBSUCCESS 작전"으로 인접국인 온두라스에서 반 아르벤스파인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반정부군을 수도로 침투시켰다. 결국 군의 지지를 상실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은 실각하고 1954년 6월 27일에 망명길에 올랐다. 그 후 미국의 전면적인 지원하에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정권은 국내 기초를 다진 후 선거에서 아르마스파의 반공연맹만을 내세운 독재체제로 나아갔는데 이에 반발한 군 내부의 아르벤스파와 아르마스파가 대립하면서 아르벤스파의 청년장교들이 군을 이탈하여 반정부군이 되어 게릴라 활동에 나서면서 과테말라의 정국은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다. 그 후 [[1957년]] 7월 26일에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가 암살되고 미겔 이디고라스 푸엔테스가 집권했지만 군 내부의 대립은 더욱 심각해져갔다. 그러다 [[1959년]] 1월에 [[쿠바 혁명]]으로 쿠바가 공산화되자 아르벤스파는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1960년 11월에 푸엔테스 대통령을 몰아내고자 아르벤스파를 중심으로 청년장교단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했다.''' 그래도 지도자들은 산속으로 도망쳤고 1962년에 또다시 무장반군을 결성했다. 이들은 [[쿠바]]를 경유한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 작전을 펼치며 항전했고, 이에 대해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정권 측은 쿠데타를 반복하면서 죽음의 부대에 의한 좌파정당과 게릴라에 협력적인 과테말라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 등으로 대응했다. 이에 국제적인 비난이 높아지자 [[1986년]]에 기독교민주당의 비니시오 세레소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1987년]]에 민족화해위원회가 발족했다. 또한 [[1990년대]] 초에 [[소련]] 해체로 [[냉전]]이 붕괴되면서 [[미국]]과 [[소련]]이 더 이상 이들을 지원하지 않게 되자 [[1996년]] 12월 29일에 과테말라 정부와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사이에 평화합의가 성립되었다. 이후 화해법이 제정되어 내전 시 정치적 범죄에 대한 면책을 인정하는 한편 약 20만에 달하는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낸 학살과 고문, 실종에 관한 죄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법이 제정되었다. 처음에는 역대 정치지도자와 군 간부는 이러한 범죄에 직접 관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소면제가 예상되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관계자들이 국내 재판소에 세워지게 되었다. [[2009년]] [[9월]]엔 펠리페 쿠사네로 전 대령이 농민 6명의 실종과 관련된 죄로 징역 150년형을 받았고, [[2013년]] [[5월]]엔 [[1982년]]부터 [[1983년]]에 대통령을 지낸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전 장군은 마야계 이실(Ixil)[* '익실'이라고 읽지 않는다. x는 권설 마찰음이다.] 원주민 1,800명을 살해한 죄로 금고 80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의 재임기에 살해된 이실 원주민은 7천이 넘는단 것이 중론이다. 리오스 몬트 재임기 살해된 사람은 7만 5천에서 10만에 달한다. 이때 과테말라의 인구는 600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헌법재판소의 개입으로 판결이 뒤집어졌고, 2015년에 시작된 재심이 진행되던 중인 2018년에 사망하여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렸다. 여담으로 리오스몬트의 딸 주리 리오스가 2015년 대선에 출마했는데, 득표율 6%로 참패했다. 내전 당시 엄청난 규모의 원주민 학살이 있었고 이를 세상에 까발린 리고베르타 멘추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 과테말라 사법부는 학살을 자행한 군인들에게 징역 '''1만 2천년'''을 선고했다. 2016년 2월 27일에는 1980년대에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강간한 전직 군 간부 등 2명에게 징역 '''360년'''을 선고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8216893|#]] [[벨리즈]]와는 국경문제로 갈등이 있으며 [[2016년]] 4월 22일에 국경지역에서 과테말라 소년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되면서 갈등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3&aid=0007185300|#]] [[2017년]]에 과테말라 의회는 옆나라인 [[엘살바도르]]와 함께 미성년자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9486152|#]] [[2018년]] 6월 3일에 과테말라의 푸에고 화산이 폭발하면서 25명이 사망하고 20명이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10126753|#]][[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10127709|#]] 그리고 구조과정이 진행되면서 사망자가 60명으로 늘어났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10128492|#]] 그리고 구조작업이 진행되면서 사망자는 85명으로 늘어났고, 실종자도 더 늘어났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10132366|#]] 거기에다 사망자가 99명으로 늘어나면서 사망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3&aid=0008638398|#]] 그리고 사망자와 실종자가 300명에 달하자 과테말라는 사실상 구조작업을 중단했고 국제구호손길이 잇따라 이어졌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10135319|#]] 그러다가 6월 8일에 화산이 다시 폭발하자 과테말라 정부는 대피령을 발령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10137930|#]] 그리고 6월 17일에 수색령을 공식적으로 중단했고 110명이 사망하고 197명이 실종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10154968|#]] 그리고 2018년 10월 12일에 다시 화산이 분화하자 인근 지역 주민 62명이 대피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421&aid=0003636367|#]] 2020년 11월에 예산이 역대 최대 규모로 국민의 부담을 가중하는 것과 비교해 교육과, 건강, 인권을 위한 예산은 줄어들었다. 국민들이 이에 반발하며 시위가 발생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054378|#]] 2021년 4월에 과테말라의 파카야 화산이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2348567|#]] 1960년대에 사라졌던 고대 마야의 유물이 과테말라로 반환됐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28&aid=000256525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