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학사/한국/조선시대 (문단 편집) == 조선의 건국과 성리학 == 한국 과학사의 관점에서 여말선초 시기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유교적인 자연관점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14세기부터 [[성리학]]의 영향이 커지기 시작했고, 조선의 건국은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신진 유학자들은 불교가 이미 극도로 타락했다면서, 이전의 전통적이며 비합리적인 불교적 자연관 대신 유학의 내용에 근거해 합리적인 사상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선배격인 [[이색(고려)|이색]](李穡) 같은 학자들은 14세기 중반까지도 아직 불교 등에 대하여 그렇게 극단적 비판을 가하지는 않았다. 불교 그 자체는 훌륭한 가르침이지만 승려와 사찰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있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 세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배불론(排佛論)이 날카롭게 펼쳐진 1390년 전후에 신진유학자들의 주장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기 시작하였고, 그 근본을 이룬 것은 유교적인 과학사상이었다.[* 현대의 관점에서 유교는 과학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당대에 유교는 자연을 나름의 법칙에 따라 최대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했다. 특히 성리학에서 동원된 태극, 기, 음양과 같은 개념은 모두 종교적 요인을 배제하고 자연을 설명하려고 도입된 경우이다. ] 이들은 물론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이나 절의 지나친 경제적 팽창 등을 공격하고 있기도 하였지만, 또한 그들의 주요 공격대상은 불교적이거나 그 밖의 미신적인 관행들이었다. 특히 자연의 이변에 대한 반응을 논의하는 [[재이론]](災異論)에서 두드러졌는데, 이전처럼 [[불교]]또는 [[도교]]적인 기도(道場 또는 齋醮)로 물리치고, 기도를 통하여 나라의 운명을 연장하여 보겠다는 왕실의 태도를 맹렬히 비난한 것이다. 감로나 사리처럼 불교적 관념에 따라 상서로 해석되는 개념에 대해서도 비판이 이어졌다. [[김자수]](金自粹)·[[김초]](金貂)·[[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은 승려와 도사 등을 목베어 제거하고, 국가의 어려움은 귀신의 힘을 빌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노력, 특히 군주의 덕을 닦는 행위로 극복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새 왕조의 건설에 밑거름이 된 이들의 반종교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사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15세기 이래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은 비교적 유교의 합리적인 태도에 억눌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조선의 건국과 동시에 불교, 도교의 영향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태조나 태종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배척하지는 않았고, 세조는 적극적일정도로 불교를 옹호했다. 유교적인 자연관이 확고해진 것은 성종 대 즈음에 이루어진다. 물론, 이것은 정부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고 민간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불교와 도교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