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학사/한국/조선시대 (문단 편집) == 조선 초 재이론 논의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재이론)] 조선 초기 자연현상에 대한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재이론]]이다. 재이론이란 자연의 이상현상들, 즉 각종 자연재해나 쳔변 등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는지에 대한 논의이다. 재이론은 조선의 현실 정치에서 직접적으로 반영되었고, 특히 조선 초 권력을 둘러싼 각종 논의에서 핵심적인 재료로 사용되곤 했다.[* 이 문단과 관련해 자세한 내용은 박성래, '한국과학사상사', 책과함께 (2015) 참고 ] 가장 먼저 재이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진 것은 바로 [[정도전]]과 태종의 갈등이다. 정도전은 <심문천답> 등을 통해, 자연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상서가 국가의 잘못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꾸지람이라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군주의 잘못'이 아니라 정치의 잘못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조선경국전> 등에서 정치의 총책임은 임금이 아닌 총재, 즉 영의정과 같은 재상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습군주제 속에서 항상 뛰어난 임금이 나올수는 없지만, 그 임금이 재상을 잘 뽑아 정치를 총괄하게한다면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도전은 재이가 일어날 경우 그 책임이 재상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즉, 재상이 정치를 잘 운영하는 것이 곧 음양을 다스리는 것이며 재이를 막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영의정 책임제 대신, 국왕이 실제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이 있는 강력한 군주정을 추구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재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구언이나 신문고 등을 활용해, 재이를 빠르게 보고받고 그것에 대해 조치를 취하는 모습을 과시한 것이다. 즉 재이가 일어난 책임이 조정이 아닌 국왕에게 있다고 천명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재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직접 대응하려 노력했고, [[하륜]]이 가뭄 등 재이가 일어나서 사직하려 하자 "재이가 옴은 재상의 허물이 아니다. 죄가 실로 내게 있지 어찌 정승에게 관계되겠는가?" 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이후, 쿠데타로 조카 [[단종(조선)|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즉 세조의 재이론에 대한 반응도 주목할 만하다. 유교적 질서에 익숙해진 관료들에게 세조의 즉위는 쉽게 정당화하기 힘들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재이를 지적하는 것은 곧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었고, 세조의 도덕성 및 정당성을 비판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자연스러게 세조는 재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국왕에게 재이의 책임을 묻는 재이론에 반감을 보였다. 대신 그는 불교를 옹호하면서, 불교적인 자연관에 따라 재이에 대응하려 노력했다. 혜성과 같은 재이가 일어나도 그것이 임금의 정치와 무관하다고 주장했고, 각종 자연현상에 대한 보고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세조실록에 가뭄을 비롯해 각종 자연재해 기록이 드문 편인데, 이 역시 재이를 보고받기 꺼리는 세조의 영향이다. 대신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불교적인 상서, 즉 [[사리(불교)|사리]]나 [[감로]] 등이었다. 세종이나 문종만 해도, 이러한 상서가 나타나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조는 이러한 상서를 보고받자 크게 좋아하며 하례했고, 불교를 진흥하는 구실로 삼기도 했다. 그 결과로, 실록에 유독 상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시기가 바로 세조 대이다. 반면 세조의 손자이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재위에 오른 후, 경연을 통해 신하들에게 유학을 철저히 교육받은 [[성종(조선)|성종]]은 다시 유교적인 방향으로 돌아갔다. 혜성의 보고를 꺼린 세조와 달리 성종의 경우 혹시 모르는 정변에 경계함과 동시에 사면령을 내렸다. 성종 5년 3월, 성종 7년 3월 과거에 책문으로는 직접 재이에 대한 문제를 출제하기도 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유교적 입장을 받아들였는데, 특히 재이와 특정 현상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경향보다는, 재이가 일어났을 때 포괄적으로 정치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연스럽게 재이가 일어났을 때 기우제와 같은 종교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경향도 줄었고, 점차 정치에 대한 반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경향은 [[연산군]] 대에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특히 [[갑자사화]]의 경우, 성리학적 자연관과 재이론을 둘러싼 왕과 신히, 특히 [[사림]]의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연산군은 재이가 일어났을 때 왕의 책임을 강조하는 신하들의 간언을 극히 싫어했고, 그것은 자연현상일 뿐이니 자신의 탓을 하지 말라고 발언하곤 했다. 연산 10년 갑자사화가 진행될 무렵, 연산군은 약 7년 전인 연산 3년 선정전에 벼락이 친 것과 관련해 자신을 비판한 이를 처벌하라 지적했고, 또 그 해 우박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도 자신에게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군주와 재이의 관계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고 왕권을 통제하던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던 재이론을 갑자사화 시기에 봉인하려 시도한 것이다. 갑자사화 이후 자연현상에 대한 보고는 극도로 줄었고, 간혹 재이가 일어나더라도 정치와 연결되어 해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재이의 관측 자체를 막기 위해, 천문을 담당하던 관상감에게 명하여 천문 보고를 축소시키고 간의대를 뜯어버리라고 명령하기도 한다. 이처럼 재이론에 대한 억압을 통해 연산군은 신하의 발언권을 축소시켜 갔고, 결국 이러한 폭정이 반정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중종 반정 이후, 당연히 재이론 역시 부활하였다. 다만 이 시기가 되면 불교/도교적 색채가 더욱 줄어들고 성리학의 내용에 충실해져서, 인격천 개념이 제거되고 자연을 철저히 기(氣)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재이가 일어나는 원인을 철저하게 인간사회의 도덕적 성취, 특히 군주의 도덕적 성취에 돌리면서, 재이를 통해 신하가 간언하고, 임금은 그에 책임지며 끊임없이 수양하며 덕을 닦고 정치를 되돌아보는 체계가 구축되었다. [[분류:조선]][[분류:과학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