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자의 (문단 편집)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19.egloos.com/c0014485_4d1c0fb58f7a9.jpg|width=250]]}}} || || {{{#ece5b6 곽분양행락도}}}[* 부귀와 영화를 누리라는 뜻으로 선물하던 그림이었다고 한다. 민간에서 곽자의가 어떤 이미지로 통용되었는지 추론할 수 있는 부분. 참고로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등에 같은 내용의 그림이 존재한다.] || [[당나라|당]] 중기의 [[명장]]으로, 당대 손꼽히는 [[충신]]이자 [[권신]]. 분양(汾陽)[* 현 [[산시성(산서성)|산시성]](山西省).] 군왕(郡王)으로 봉해져 곽분양이라고도 불린다. 수많은 전투의 승리로 인한 장군으로서의 드높은 공훈과 명성, [[위구르|회흘]]과의 화친을 단독으로 성립시켰다는 외교적 공적, 문무 양면으로 중서령과 [[원수(계급)|원수]]직에까지 오르는 데 성공한[* [[당나라]]는 [[영구결번|관례적으로 상서령을 임명하지 않는다.]] 이는 [[태종(당)|당태종]]이 상서령을 맡았었기 때문. 따라서 당에서 중서령이면 다른 나라/시대에서의 상서령과 똑같이 비황족 일반 신하로서 오를수 있는 최고봉이다. 심지어 공이 엄청나다 보니 아예 황제인 [[대종(당)|당대종]]이 상서령 한번 해보는 게 어떻냐는 식으로 먼저 제안한 적도 있을 정도다. 이게 농담이든 진심이든 간에 그 당시 그가 보인 업적은 황제가 이 말을 하기 거리낌없을 정도로 엄청났다는 것이다.] 극에 달한 관운, 무슨 무협소설에나 나올법한 '''[[이성왕]]'''[* ([[국성]]과) 성씨가 다른 자, 곧 황족이 아닌 자에게 봉해지는 왕작. 중앙집권이 확립된 이래 '황족이 아니면서' & '생전에' & 자칭이 아닌 '천자로부터 직접' 왕작에 봉해진 경우는 중국사 전체에서도 손에 꼽는다. 이성왕이라는 개념은 당대에는 이미 수백년 전 초한전쟁기에나 존재했던 전설의 봉작이었으며 수, 당의 시조들 중에서도 왕 출신은 없고 국공 출신 뿐이었다. 엄밀히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위무제 [[조조]], 진문제 [[사마소]], 송무제 [[유유]], 제고제 [[소도성]], 양무제 [[소연]], 진무제 [[진패선]]도 한때 이성왕이기는 했으나 사실상 망하기 직전인 막장 왕조의 절대권력자로서 국공 작위를 셀프로 승급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본인이나 그 아들이 제위를 찬탈해 왕작 자체가 의미없게 되었다.]이라는 전설급 작위, 수많은 숙장과 명장들과 쌓은 인맥[* 수많은 당말의 장수들([[신당서]]에 따르면 곽자의 휘하의 장수들 중 '''60여 명'''이 높은 장수 또는 [[재상]]직에 올랐다고 한다.)이 곽자의 휘하에서 성장했다. 말 그대로 당대 [[군부]]의 [[따거|큰형님]]. 곽자의의 위상이 너무나도 높다보니 이들이 왕후나 재상이 되었어도 곽자의 앞에서는 [[부곡]]이나 다름없었다고.]으로 이루어진 당대 최고의 명성과 위엄까지 모두 가졌던 인물.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곽자의가 출정했다는 소문이 돌자 저절로 무산된 반란'''도 있었을 정도였다. 거기다 여러 차례의 참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영달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 [[처세술]]을 지녔고, 개인적으로도 16명에 달하는 자식[* 아들 8명, 딸 8명.]과 100여명에 달하는 손자들까지 두며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다른 권신들처럼 [[토사구팽]] 당하지도 않고 천수를 누렸다. 그야말로 '''부와 명예, 장수까지 다 누린 [[인생승리자]]의 표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