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자의 (문단 편집) == 평가 == || [[파일:external/www.greatchinese.com/guoziyi.jpg|width=250]] || >天祚土德,實生汾陽。(천조토덕 실생분양) >하늘이 토덕[* 당 황실은 스스로 오행 중 토(土)의 기운을 이어받았다고 자평한다. 그래서 토덕.]에 복을 내려, 실로 분양(왕)을 낳았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구당서』 곽자의전'''}}} 곽자의가 당대에 받은 평가는 구당서의 저런 표현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찬사 일색.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그 홀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평했으며, 당덕종은 그를 일컬어 힘써 하늘 기둥을 받쳤다고 평했다. 한마디로 말해 이미 생전부터 [[당나라]]판 [[이순신]] 정도로 찬양 받았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사후에 받은 시호도 [[충무]]였고.[* 생전 작위가 분양왕(汾陽王)이라 최종적인 호칭은 '분양 충무왕(汾陽 忠武王)'이다.] 곽자의는 또한 시성 [[이태백]]에게서 고평가를 받은 유일한 동시대 인물[* 이태백은 황실의 어용시인 시절에 황가 인물들을 빨아준 것 빼곤 그 어떤 인물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로, 이태백은 그를 가리켜 '그는 전장에선 항상 노(勞)했고 평시에는 언제나 겸(謙) 하였다'며 '당의 시대에 등장한 모든 명성 높은 장군들을 가운데서도 곽자의는 홀로 돋보이는 인물'이란 평을 내렸다.[* 물론 이 둘은 이태백이 곽자의를 변호해준 이후 친분을 가지기도 했고 그후 안사의 난땐 반대로 억울하게 죽을뻔한 이태백을 전력으로 변호해서 구해주기도 했던게 곽자의긴 했다. 즉 인간관계에 냉혹했던 이태백과 가까이 지낸 몇안되는 인물이었던 것.] 가까운 시대 인물이라는 어드밴티지가 있긴 했으나 말 그대로 '''구국의 성웅''' 정도의 평을 받은 것. 게다가 보통 명장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다른 재주가 미비하여 빛이 바래는 경우가 많은데 곽자의는 정치외교력마저 뛰어난 만능형 장군이었는데다, 아무리 청렴결백한 명장도 군주와 간신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정치생명이 짧고 끝이 비참한 경우가 많은데 불구하고 곽자의는 전쟁 외적으로는 굽힐때 굽히고 숙일때 숙이며 엎드릴 때 납작 엎드려 화를 피할 줄아는 정치적 처세의 달인이었던 덕분에 그 많은 시기와 질투와 모함을 받고도 말년에까지 평온하고 부유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았고 죽은 후에도 명성을 유지하였다. 후대에는 아무래도 비슷한 인생('큰 공을 세우고' '그 공적으로 인해 국가의 최고위직에 오르며' '그 위치에서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진충보국했다')을 살았다는 것 때문인지 [[제갈량]]과 같이 묶여서 불리기도 했다. 이는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로, 후술된 [[이순신]]의 시조 중엔 "恢復思諸葛(중원을 회복하던 제갈양이 생각나고), 長驅郭子儀(위기를 막아내던 곽자의가 그립구나)" 하는 대목이 있다. 그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 찾아보면 간간히 곽자의의 이름이 거명되는 경우가 나오곤 한다. 다만 (지배층이 아닌) 민중들 사이에선 그런거 다 필요없고 '''오복[* 서경에는 수(장수), 부, 강령(몸과 마음의 건강), 유호덕(도덕적인 삶), 고종명(제 명을 다하고 편히 죽는 것)을 오복이라고 일컬으며, 서민들 사이에선 치아 건강, 자식 복, 부부의 백년해로, 손님을 대접할 재산, 그리고 명당자리에 묻히는 걸 오복이라고 보았다 한다. 어느 쪽의 오복이 됐던 대부분을 누리긴 한 사람이다.]을 다 누린 인생의 승리자''' 정도로 여겨져 왔다. 같이 묶이던 제갈량과 비교해보면 지혜의 제갈량, '''복락의 곽자의''' 정도로 대비된다. --한마디로 럭키맨-- '나도 곽자의처럼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 열망 때문에 그려진 그림이 바로 저 위에도 있는 그림인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곽자의 가족사진-- 저 그림을 그려서 집에 놓고 살면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동아시아 전역에 퍼진 그림이라고 한다. 또한, 곽자의는 민중들 사이에서 행복의 신인 '''복성(福星)'''으로 추양받으며, 쓰촨성에서는 재물의 신인 '''재신(財神)'''으로 추양받는다. [[견우와 직녀]]의 바로 그 직녀를 만났다는 전설도 있는데, 젊은 시절 축제날에 내려온 직녀를 알아본 곽자의가 행복과 재물을 달라고 빌자 직녀가 그를 '행복과 재물의 신'으로 부르고 명예와 부귀를 얻게 될 것이라 약속했다는 이야기다. 또한 '''곽자의다손'''이라는 고사성어에서도 알 수 있듯 자식복을 내려주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워낙에 다복을 누리고 살던 사람이다보니 '저 사람 참 복 받았네' 하는 걸 일컬어 '''곽분양팔자'''라는 말도 생겨났다. 뜻은 당연히 곽자의의 팔자라는 것. 곽자의의 관록을 현대로 비교하면 50대에 변방에서 준장했던 장성이 외적의 침략과 내란을 슬기롭게 진압하여 10년내 대장에서 육참총장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 국가안보실장 국정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까지 역임하고 80대에 최고 명예직인 원수계급에 오른 것과 다름 없었다.[* 다만 이렇게 보면 출세는 꽤 늦었다. 당시 관점으로 50대면 보통 사망하는 나이대다. 현대와 비교하면야 정상적인 출세지만 그래도 지금은 60은 보장되는 시대고 전쟁이 잘 없는 시대라 그렇지 당시로선 50도 못사는 사람도 많은 시대에서 50대 준장급은 출세가 늦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통칭 삭방군 인맥의 알파이자 오메가이기도 하다. '''삭방군 인맥'''이란 이 시기에 나라를 지켜내는데 큰 공을 세운 삭방진 출신 인물들이 군권에 형성한 인맥 집단을 일컫는데, 실제로 이때에 삭방진(안사의 난 이후 삭방진을 여럿 갈라서 빈녕, 경원, 부원진을 설치하고 절도사를 두었으니 이쪽까지 포함) 출신으로 나라에 큰 군공을 세우고 재상직까지 오른 인물들이 대단히 많았으며 그들 대다수가 곽자의의 휘하에서 성장했다. 이때문에 자치통감에는 '''그가 거느렸고 그를 보좌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대관에 이르고 유명한 대신이 된 사람이 아주 많았다.'''는 말로 이를 정리하고 있다. 또한 중국 종교사에도 영향을 미친 인물. 곽자의 본인은 [[경교]](중국에서 현지화된 [[네스토리우스교]])를 믿지 않았으나 경교를 후원했고, 여기에 힘입어 부장 중의 한 명이었던 이사(伊斯, 'Issac'의 음차라는 설이 있다.)를 비롯한 인사들이 당 덕종의 후원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결과물이 바로 781년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이로 인해 경교는 [[측천무후]] 시기 불교의 성장으로 인한 상대적인 위축과 당 무종의 외래 종교 탄압 조치에 따른 퇴출 사이에서 가장 많은 후원을 받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