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종석 (문단 편집) === 심즉리설 === 곽종석은 퇴계학파의 비주류계열 학자인 이진상의 문인이다. 이진상은 당시 영남 학계의 거두인 안동학파와 대비되는 심즉리설과 주리설을 주창하며 한주학파를 결성한 학자다. 그러나 그의 학설이 이황의 학설을 정확히 계승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생존 당시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퇴계학파로부터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일례로 이진상이 죽은 뒤 곽종석이 '한주문집'을 간행하여 퇴계학의 본산인 도산서원으로 보낸 일이 있었는데, 도산서원에서는 내용을 심의한 결과 이진상의 학설이 이단이라고 단정하고 문집을 반송했다. 또한 1902년에는 한주문집에 반감을 품은 영남계 유학자가 한주문집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곽종석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이진상을 옹호했고, 결국 도산서원은 이진상이 퇴계학파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인정했다. 곽종석이 이진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심즉리설'은 인간의 마음 그 자체에 담긴 의지가 바로 우주를 이끌어가는 이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이 의지력(心)을 가지고 도덕 문화를 적극적으로 보호, 확대시켜 나가야 이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즉리설은 사실상 理(또는 性)가 현실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고 본 [[주자]]의 시각과 배치되는 것이었지만, 이진상과 곽종석은 [[이황]]도 理에 능동성을 부여했다고 주장했으며, 자신들은 心의 입장에서 이러한 논리를 더욱 확장시켰다고 밝혔다. >심은 리이고, 성은 리가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이며, 정은 리가 움직이는 것이다. 심은 일관된 이치이고 성정은 거기에서 나온 갈래이다. >---- >한주문집 이러한 곽종석의 심즉리설은 현실과도 연계되었다. 당시 간재 전우를 비롯한 대다수 유학자들은 조선이 일제에게 침탈당하자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도덕 문화의 일맥을 보존하는데 전력했다. 곽종석 역시 을사조약 및 한일병합이 발표되자 태백산, 가야산 등에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그러나 그는 전우 등과는 달리 국내외 현안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고 여러 인사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였다. 이는 자신의 마음에 담긴 의지를 발현시켜 조선의 암울한 현실로 인해 쇠락한 이치를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한편 곽종석은 심즉리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이 학설이 [[양명학]]의 심즉리와 유사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며 강한 의혹을 받았다. 이에 대해 곽종석은 자신들의 심즉리는 양명학의 심즉리와는 완전히 다르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가 심즉리를 강조한 배경은 양명학의 그것과 유사하다. 양명학은 성리학이 보편성에 함몰되어 구체성과 실천성을 상실해가는 것에 반발하여 심즉리를 주장해 '지행합일' 정신을 통해 실천 논리를 재발굴하고자 했고, 곽종석 역시 심의 주재성과 이의 능동성을 부각시킴으로서 외세의 침탈로부터 조선의 유교 문명을 적극 수호하는 실천 논리를 이루고자 했다. 그는 성리학의 근간인 '성즉리'의 입장을 긍정하면서도 심즉리를 주장한 것은 '성즉리'의 이론이 현실 대응 논리로서 부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