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튜브 (문단 편집) === 유튜브 시작 전 === 신연초등학교([[우암동(부산)|우암동]]) - 배정중학교([[남구(부산광역시)|남구]] 우암동) 중학교때까지 거주지의 학교를 배정받아 다녔고 고등학교는 동구 [[초량동]] 소재의 가깝다고 할 수 없는[* 배정중학교에서 컴과고까지 대중교통과 도보를 포함해 약 3~40분 정도가 걸린다.] 컴퓨터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는데, 후술하겠지만 본인의 선택에 의해 컴과고를 다니게 된다. 어머니 가게가 있는 북구 [[화명동]]은 본인과는 연고가 없는 곳이며, 본인은 유튜버 생활을 하며 살아온 [[사상구]] [[덕포동]] 출신이라고 밝혔다.[* 2023년 2월 2일 생일기념 유튜브 생방송] 학창시절은 암울함의 연속이었다.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살았는데, 그 시작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외모와 왜소한 체격, 작은 키 때문에 시작된 학교폭력은 중학교에 가서도 이어졌다. 그 시절 곽준빈이 당했던 학교폭력으로는 [[빵셔틀|빵 사오기]], [[금품갈취|체육복이나 교과서 빌려가고 안 돌려주기]], [[특수폭행|컴퍼스로 등 찌르기]] 등이 있었다고. 동급생인데도 그 밑의 존재처럼 여겨졌었다. 고등학교에 갈 때가 되자 새로운 학교생활을 하고팠던 곽준빈은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고, 중학교에서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었기에 일부러 멀리 떨어진 [[부산컴퓨터과학고등학교|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 초반까지는 학교폭력으로부터 해방이었다. 반에서 1등도 했었고 친구들에게 재밌는 친구로 여겨졌다. 그러다 1학년 중반 즈음 누군가가 곽준빈에게 '걸베이'[* '거지'의 [[동남 방언]].]로 불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줬고 원래대로 돌아갈 것임을 직감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당시 실업계는 어지간한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분위기가 살벌했기에 저런 우려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 그 후로 서서히 조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학창생활 수 년동안 쌓인 학교폭력 스트레스가 터지면서 자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부모님은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무작정 가출하게 된다. [[거가대교|가덕도와 거제도를 잇는 도로]]가 없던 시절[* 거가대교는 2010년 말에 개통했다. 거가대교 개통전까지는 부산에서 거제도로 갈때 배를 타는게 더 빨랐다.]이라 배를 타고 [[거제도]]로 가서 감자탕집에 알바도 구하고 10만원짜리 월세방도 찾을 정도로 새 삶을 살으려 하다가 회의감이 들었고, 배추밭에서 자면서 현실과 사회의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가출 4일만이던 날 밤 9시에 엄마에게 전화해 거제도에 있다고 밝히자 부모님이 한달음에 달려와 새벽 4시에[* 위에서 언급했지만 당시는 거가대교가 없었기 때문에 부산에서 거제도를 차량으로 가려면 사실상 경남 남해안 일대를 빙 둘러 갔어야 했고 도로망도 열악해 최소 3시간은 잡았어야 했다.] 도착해 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가는데, 죄송한 마음은 굴뚝같지만 무너진 인생사를 말할 수 없어 가는 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부모님이 한 한 마디가 "귀 뚫었네?"였다고 한다. 당시의 곽준빈은 한번 양아치로 살아보려는 생각도 있었던지라 귀도 뚫어봤다고. 그후 집에서 일주일 정도 [[히키코모리|폐인]]처럼 지냈는데 [[대인기피증]]도 생기고 상태가 심각해지는 것을 느껴 엄마에게 그간의 일을 다 털어놓고 자퇴하고 싶다고 하자 엄마가 미안해하면서 바로 허락이 떨어졌다. 자퇴 후 미용실 아줌마가 말을 걸면 말더듬다가 집에 갈 정도로 대인기피증도 심해졌다. 18살에는 매일 새벽까지 인터넷하고 일어나 또 하고 망상에 쩔어 살았다. 침대와 인터넷이 일상이었다. 그러다 19살 때 지금까지도 친한 친구 두 명이 다가와 줘서 조금 괜찮아졌다. 나이가 나이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대학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다보니 대학에 진학하려는 생각이 들어 검정고시를 치고 합격해서 수능을 바로 쳤는데 처참한 성적이 나와 부산외대 제일 낮은 3과에 지원해 다 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또 망한 인생이려나 하다가 엄마에게 이제는 정말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없는 살림에 빚까지 내서 입시학원에 들어가 재수를 준비했다. 그렇게 한두달은 열심히 하다가 처음 겪어보는 정상적인 인간관계에 흥미를 느껴 노는데 재미 붙였다. 그러다 수능을 치고 나온 성적으로 대학에 지원하는데, 희망대학은 무조건 부산외대 아니면 한국외대였다. 한국외대 스페인어과는 성적이 안돼서 떨어졌고 그보다 낮게 쓴 부산외대 러시아어과에 붙게 되었다. 외대를 희망하기 시작한 건 자퇴 후 인터넷만 하고 살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곽준빈은 막연히 그냥 외국에 나가고 싶었다. 한국인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고, 한국에서의 삶이 지치고 버거웠고, 외국에서는 성공할 것 같았고,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또, 축구 때문이기도 했다. 인터넷과 TV만 보다보니 해외축구에 빠져들었다. 외국으로 가서 외국어 실력으로 통역사 일을 하면 좋아하는 해외축구를 무료로 직관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러시아어를 배우게 된 것이 축구 때문이었는데, 해외축구에 빠져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리그가 있기 마련이고 곽준빈이 가장 좋아하는 리그는 잉글랜드의 [[프리미어 리그]]였다. 그렇다고 영어과를 지원하기에는 훨씬 잘하는 사람도 많고 경쟁률도 높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페인어과([[라리가]])를 제일 가고 싶어했는데 떨어졌고 독일어과([[분데스리가]])도 떨어졌다. 그냥 안전빵으로다가 쓴 부산외대 러시아어과에 합격해 배우게 된 것. 정확히는 러시아어과가 아니라 러시아인도통상학과[* 러시아와 인도는 여러가지로 크게 연관이 없음에도 묶여있었는데 원래 비주류 언어들은 이런식으로 뜬금없이 과를 묶는 경우가 자주있다. 결국 곽튜브가 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과가 분리되었고 현재는 단과대학 소속 자체도 달라졌다.]에 가게 되었다. 그 때문에 러시아어를 익히게 된 것이고 이게 추후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생활을 하며 하고 싶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뤄나가기 시작했다. 친구도 사귀었는데, 그 중 [[계곡은개골개골]]을 대학 선후배 사이로 만나 친해졌고, 계곡은개골개골의 오랜 친구인 [[야만스러운]]도 연이 닿아 친해졌다. 외국에 가고 싶었는데 당시 있었던 제도를 통해[* 한국에서 종합외대는 한국외대, 부산외대 단 2곳 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유학 등의 기회가 많은 편이다. 특히 희귀언어 전공자일수록 더욱 그렇다. 심지어 일부의 경우 제발 사람 좀 보내달라고 사정하는 경우까지 있다. 보통 이런 사업은 국가나 공공기관 등의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지원자가 예상보다 적어 받은 금액을 다 소진하지 못하면 주최기관은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케이스라면 참가자들 입장에서는 돈 한 푼 안들이고 해외 경험을 하는것도 가능하다. 예를들어 항공료만 내면 기숙사비는 물론이고 생활비 일부까지 포함해 모든 것은 지원을 해준다거나 심지어 항공료까지 지원해주는 경우도 있다. 프로그램의 참여 난이도도 서류 올리고 인터뷰만 제시간에 가면 그냥 합격해 버릴 정도로 난이도가 낮아진다. 영어, 스페인어 등의 주류 언어쪽에서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면 서류부터 해서 엄청난 준비를 해야 되는것을 감안하면 매우 대조적이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기술공과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유학을 가기 전 그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 한번 크게 울었다.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 올랐다는 생각에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러시아 유학은 성공적이었다. 남들보다 더 간절했고, 남들보다 가서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다. 때문에 러시아어 공부는 몸으로 부딪히며 열심히 배웠다. 연애도 이 시절에 세 번 해봤다. 유학을 마치자마자 부산 [[사하구]] [[다대동|다대포]]에 있는 한 중소기업에 면접보고 바로 합격했다. 영업부 사원 블라디미르 곽으로 입사해 일을 배웠다. 영업의 인재다, 러시아어 잘한다 하면서 회사에서 곽준빈을 되게 좋아했는데, 하고 싶은 게 맞나 회의감이 들어 4개월만에 그만뒀다. 그래도 첫 직장이었으니 애착은 가서 그 시절 명함은 지갑에 가지고 다닌다. 2017년에 블라디보스토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서 인턴생활도 했었다.[* 맨날 옆 롯데호텔 화장실을 사용했었는데, MBC 사십춘기에 롯데호텔 회전문을 나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https://youtu.be/MC_VOtTrwjY?t=80|#]]] 퇴사 후 모은 자금을 바탕으로 바로 아일랜드 [[리머릭]]으로 영어 유학을 떠났다[* 당시 제일 저렴한 어학원이었다고 한다.]. 영어 공부도 알바하면서 몸으로 부딪혀 단기간에 실력을 늘렸다. 처음에는 말 걸기가 어려웠는데 하다보니 잘 되었다. 유학이 마무리 될 즈음에 이력서를 미국, 영국, 아일랜드의 여러 회사에 썼다가 대사관에도 5개 정도 지원했다. 대사관은 내심 안 될 줄 알면서도 넣어본 거였는데, 면접도 보게 되더니 최종 합격을 받았다. 2018년 4월 29일 입사해 [[어버이날|5월 8일]] 외교부 명의로 화환이 왔는데, 문구가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였다. 받자마자 가족 모두 펑펑 울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