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회 (문단 편집) === 죽음 === 255년 1월 30일에 곽회는 세상을 떠났고, 대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를 정후(貞侯)라고 하고 아들 곽통(郭統)이 후사를 이었다. 관구검전에 따르면 [[문흠]]은 곽회에게 서신을 보내 [[관구검]]의 난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곽회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헛일이 되었다. 곽회 사후인 함희 연간에 다섯 등급 작위를 세웠는데, 곽회가 공훈이 많았으니 부양자(汾陽子)로 바꾸어 봉했다. 진태전에 따르면 진태는 곽회에게 정서장군직을 인계받아 정서장군으로 활동하게 된다. 곽회도 상당한 노장에 속하는데, 172년 생 [[왕릉(삼국지)|왕릉]]의 누이동생이랑 결혼해 아들만 다섯을 두었으니 대충 170년대 중반~180년대 초반 쯤 출생으로 가정할 수 있다. 물론 왕릉의 누이가 왕릉과 나이차가 크게 나지 않을 경우엔 170년대 생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군직에 나선 한중 공방전 당시 40대 중반, 강유와 맞붙을 때는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되므로 너무 나이가 많다. 하지만 180년대 생으로 보더라도 강유와 맞붙을 때는 60대고 죽을 때는 70대 중반 쯤이니 충분히 노장에 들어간다. 어차피 조위의 장군들은 장수만세로 유명하고, 같은 시기 촉한에도 70~80대에도 군부 중진으로 활동한 [[요화]], [[장익(삼국지)|장익]], [[종예#s-1]] 등이 있었으니 딱히 이상한 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