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도대전 (문단 편집) === 관도 전투 === >공은 관도(官渡)로 돌아와 주둔하고, 원소는 진군해 양무(陽武-하남군 양무현)를 지켰다. 관우가 달아나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 >8월, 원소가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모래언덕에 의지해 둔영을 세웠는데 동서로 수 십리에 이르렀다. 공 또한 둔영을 나누어 서로 대치하고 합전(合戰-맞붙어 싸움)했으나 불리했다. > >원소가 다시 진격해 관도(官渡)에 임하여 토산(土山)을 세우고 땅굴을 팠다. 공 또한 안에서 이를 만들어 서로 대응했다. 원소가 둔영 안으로 활을 쏘니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다닐 때는 모두 방패를 덮어써야 했고 군사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 >이때 공의 군량이 적어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는 일을 의논했다. 순욱이 말했다, > >“원소는 모든 군을 관도에 집결시켜 공과 더불어 승패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공은 지극히 약한 것으로 지극히 약한 것을 감당해야 하는데, 만약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필시 저들이 이를 틈탈 것이니 이는 천하를 가름하는 관건입니다. 게다가 원소는 포의지웅(布衣之雄-평범한 사내)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일에는 능하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는 못합니다. 무릇 공께서는 신무명철(神武明哲)을 지니고 대순(大順)으로 보좌하는데,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 >공이 이 말에 따랐다. > >여남의 항복한 적 유벽(劉辟) 등이 모반하여 원소에 호응하고 허도 주변을 공략했다. 원소가 유비를 도내 유벽을 돕게 하자 공이 조인(曹仁)을 보내 이를 격파했다. 유비는 달아났고 마침내 유벽의 둔영을 깨뜨렸다. >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 수천 승이 도착하자 공(公) 은 순유(荀攸)의 계책을 써서 서황(徐晃), 사환(史渙)을 보내 이를 요격해 대파하고 수레를 모두 불태웠다. >---- >「무제기」 >허유(許攸)가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 >“공께서는 조조와 서로 공격하지 마십시오. 급히 제군(諸軍)을 나누어 대치하게 하고, 곧바로 다른 길을 따라 천자를 영접한다면 대사를 이룰 것입니다.” > >원소가 이에 따르지 않으며 말했다, > >“나는 응당 먼저 그를 포위한 뒤에 취해야 하오” > >이에 허유가 분노했다. >---- >무제기 주석에서 인용된 「한진춘추」 >태조가 관도로 돌아왔다. 저수가 또 말하길 > >“북쪽엔 병사의 수효가 많아서 과단성있고 날랜 것은 남쪽에 미치지 못하고, 남쪽에 양곡이 비고 적어서 재화로는 북쪽에 미치지 못합니다. 남쪽의 이로움은 급히 결전하는데 있고, 북쪽의 이로움은 천천히 취하는 것에 있습니다 마땅히 천천히 지구전을 펼쳐 날로 달로 시간을 소비하십시오” > >라 했으나 원소가 따르지 않았다. 연이은 군영이 점차 진전하여 관도에까지 닥쳐왔다가 합전(合戰)하게 되니, 태조군이 불리하였으나, 군영을 회복하였다. > >원소가 높은 망루(高櫓)를 만들고 토산(土山)을 일으켜, (조조군의) 진영 속으로 활을 쏘니 진영에서는 모두 방패로 덮고서는 다들 크게 두려워했다. 태조가 이에 발석거(發石車)를 만들어 원소의 누각을 공격하니 모두 격파되고, 원소군에서는 이를 벽력거(霹靂車)라 불렀다. > >원소가 땅굴(地道)를 만들어 태조의 진영을 습격하여 했다. 태조가 번번이 안쪽에서 긴 참호를 만들어 막아내고, 또 정예병을 보내 원소군의 운반수레를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거기에 실린 양곡을 다 불살라 버렸다. 태조가 원소와 서로 대치한지 시일이 오래되어, 백성들은 피폐하고 곤핍하니, 많은 이가 반역하여 원소에게 호응하였고 군량도 모자랐다. >---- >「원소전」 백마와 연진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관도로 물러났다. 저수는 원소에게 지구전을 하자고 조언하나 원소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렵에 관우는 조조에게서 달아나 유비한테 돌아간다. 이번엔 허유가 원소에게 군을 나눠 천자를 영접하자고 말하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 8월, 원소는 군영을 연결해 전진하며 마침내 관도까지 이르렀다. 원소군이 토산을 쌓고 높은 망루를 만들어 그 위에서 화살을 쏘아대니 다닐 때는 모두 방패를 뒤집어 써야했고 병사들이 두려워했다. 또 원소군이 땅굴을 파서 습격을 시도하니 조조군은 안쪽에서 참호를 파서 막아냈다. 이런 전투가 수십일 지속되었다. 조조가 군량이 부족해 순욱한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는 것을 의논하자 순욱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원소는 모든 군을 관도에 집결시켜 공과 더불어 승패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공은 지극히 약한 것으로 지극히 약한 것을 감당해야 하는데, 만약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필시 저들이 이를 틈탈 것이니 이는 천하를 가름하는 관건입니다. 게다가 원소는 포의지웅(布衣之雄-평범한 사내)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일에는 능하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는 못합니다. 무릇 공께서는 신무명철(神武明哲)을 지니고 대순(大順)으로 보좌하는데,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결국 조조는 허도로 돌아가지 않고 원소와의 대치를 이어나갔다. 한편 대치한지 오래되자 후방, 특히 예주의 여남에서 배반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남에서 유벽이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게 호응하자 원소는 유비를 보내 군을 이끌고 무리를 일으켜 허도 남쪽을 공략하게 했다. 그리고 허도 남쪽에 붙어있는 여남군은 원씨의 고향으로, 원소에 호응하는 세력이 여럿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태조는 원소(袁紹)와 더불어 관도에서 서로 오랫동안 대치했는데, 원소가 유비(劉備)를 보내 은강(濦彊-예주 여남군 은강현) 등 여러 현을 돌며 많은 무리를 일으켜 호응하게 했다. 허현 남쪽에서 관원과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하자 태조가 이를 근심했다. > >조인이 말했다, > >“남방 사람들은 대군(大軍)이 바야흐로 (원소와 대치하느라) 목전이 급박하므로 그 사세상 구원해줄 수 없으리라 여기는 터에 유비가 강병(彊兵)으로 당도하니 그들이 배반한 것은 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유비가 새로 원소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어 그들을 능히 부릴 수 없을 것이니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 >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기고는 (조인에게) 기병을 거느리고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조인은 이를 패주시키고 모반한 현을 모두 다시 수습하고 돌아왔다. >---- >「조인전」 >조홍과 함께 은강적(濦彊賊) 축비(祝臂)를 공격해 깨뜨렸다. >---- >「서황전」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원소가 사자를 보내 이통을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했고 유표가 몰래 또다시 이통을 불렀으나 이통은 모두 거절했다. > >이통의 친척과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지금 당신은 고립되어 위험한 상황에서 단독으로 지키고 있는데, 강대한 원조를 잃으면 지키며 기다릴 방법도 없으니, 빨리 원소에게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 >이통은 칼을 움켜쥐고 그들을 질타하며 말했다. > >"조공은 현명하고 이치에 밝아 반드시 천하를 평정할 것이오. 원소는 비록 지금은 강성하지만, 함부로 임용하고 계책도 없으니 결국에는 조공의 포로가 될 것이오. 나는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조공에게 두 마음을 가질 수는 없소." > >즉시 원소의 사자를 죽이고, 인수(印綬)를 조조에게 보냈다. 또 군 안에 있는 도적 구공(瞿恭), 강궁(江宮), 심성(沈成) 등을 공격하여 남김 없이 무찌르고 그들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 그리고 회하(淮)와 여수(汝) 일대를 평정하였으니 도정후(都亭侯)로 바꿔 봉하고, 여남태수(汝南太守)로 임명했다. >---- >「이통전」 >당시 원소는 하삭(河朔) 일대에서 매우 강대하였다. 여남(汝南)은 원소의 본적이 있는 군으로 문생이나 빈객이 각 현에 분포하여 병사를 끼고 저항하고 있었다. 조조는 이 점을 걱정하여 만총을 여남태수로 임명했다. 만총은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 5백 명을 모았으며, 그들을 인솔하여 20여 벽(壁-군루)을 공략시키고, 아직 투항하지 않는 우두머리를 유인하여 앉은 자리에서 10여 명을 죽이자 단번에 모두 평정되었다. 인구 2만호(戶)와 병사 2천명을 얻었는데, 그들에게 밭으로 나가서 경작하도록 명령했다. >---- >「만총전」 이때 언급되는 지명이 바로 은강(濦彊)이라는 지명인데, 이 은강현은 허도 바로 남쪽에 붙어있기에 만약 유비에 호응한 반군이 장악하게 되면 굉장히 골치아파지는 상황이었다. 이 때 조인이 나서서 유비를 토벌하고 오겠다 말하고, 조조는 조인에게 기병을 주어 후방을 정리하게 한다. 호언장담했듯이 조인은 성공적으로 유벽과 유비를 격파한 후, 배반한 현들을 수습하고 돌아왔다. 원소에 호응한 무리로 보이는 은강의 도적 축비 역시 서황과 조홍에게 격파당했다. 한편 원소는 유비를 보내는 것 뿐만 아니라 여남의 유력자인 이통을 회유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통은 원소의 사자를 죽여버리면서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여러 도적들을 모조리 토벌하여 평정했다. 만총 또한 500여 명을 데리고 20여 개의 군루를 공략했으며 우두머리 10여명을 죽여 도적들을 평정했다. >원소가 별장(別將) 한순(韓荀)을 보내 서쪽 길을 노략질하고 끊게 하자 조인이 계락산(雞洛山)에서 한순을 공격해 대파했다. 이로 말미암아 원소는 감히 다시는 군사를 나누어 출군하지 못했다. >---- >「조인전」 >원소와 관도(官渡)에서 대치를 하게 되었다. 군량이 떨어지자 순유는 조조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 >“원소의 치중대가 저녁 무렵에 도착할 것입니다. 적장 한순은 날래기는 하지만 적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 때 기습을 한다면 깨뜨릴 수가 있습니다.” > >조조가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묻자 순유는 서황(徐晃)을 추천했다. 서황은 사환(史渙)과 함께 원소의 치중대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 >「순유전」 >또한 사환과 함께 고시(故市-하남군 고시현)에서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를 공격했는데 가장 많은 공을 세워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 >「서황전」 >다시 사환(史渙) 등과 함께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를 노략질하고 그 양곡을 불태웠다. >---- >「조인전」 대치가 길어지자 양군 모두 보급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원소는 한순을 보내 계락산에서 조조의 보급을 끊게 하지만 조인에게 격파당했고, 원소는 이후 다시는 군을 나눠 출군하지 못했다. 반면 조조의 경우, 순유의 계책으로 서황, 사환, 조인을 보내 고시에서 원소군의 군량을 불태우는데 성공한다. >공이 원소와 서로 대치한 지 여러 달이 되어 비록 전투를 치루고 적장을 베었으나 군사는 적고 군량은 소진되어 사졸들이 피폐해졌다. 공이 군량을 운반하는 자들에게 말했다, > >“보름 안에 너희들을 위해 원소를 격파할 것이니 다시는 너희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겠다.” >---- >「무제기」 이러한 조조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원소군의 공세는 계속 이어졌다. 군량을 운반하는 자들에게 보름 안에 원소를 격파하겠다고는 했지만, 원소군의 퇴각을 기다리는 처지였지 조조 본인에게 원소군을 격파할 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