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도대전 (문단 편집) === 원소의 패주 === >원소군이 크게 무너져 내리니 원소와 원담은 군을 버리고 황하를 건너 달아났다. 이를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고, 원소군의 치중(輜重)과 도서(圖書), 진보(珍寶-진귀한 보물)들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군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 >공이 원소의 서신을 거두었는데, 허도와 군중(軍中) 사람들의 서신을 얻자 이를 모두 불태웠다. > >기주(冀州)의 여러 군(郡)들 중 성읍(城邑)을 들어 항복한 곳이 많았다. >---- >「무제기」 >원소와 원담등은 두건을 쓰고 말을 타고 도망하여 (신분을 숨긴채 패주했다는 말), 800여기를 이끌고 강을 건너, 여양(黎陽) 북쪽 강가에 닿았고, 그곳의 장수인 장의거(蔣義渠)의 진영안으로 들어갔다.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원소는 장의거를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 >"내가 비록 수령이지만 지금은 당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된다." > >라고 말했다. 장의거는 원소를 장막 안으로 모셨고, 영을 내려 원소가 건재함을 알렸다. > >원소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서서히 군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원소와 합류하지 못한 나머지 군사들은 조조에게 항복했는데, 조조는 이들을 모두 파묻어 죽였다. (조조군이) 앞뒤로 죽인 것이 대략 8만에 달했다. >---- >『후한서』 「원소열전」 원소군이 궤멸하자 원소는 신분을 숨긴채 800여기만을 이끌고 간신히 황하를 건넜다. 이후 장의거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사태를 수습한다. 원소에게 돌아가지 못한 병사들은 모두 조조가 파묻어 죽였다. 관도 전역에서 죽은 원소군은 7~8만명이나 되었고 이는 원소군에게 쉽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이후 원담과 원상은 다시는 이러한 대군을 운용할 수 없었다. 무제기에 배송지가 주를 달면서 인용한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에 의하면 조조는 헌제에게 다음과 같이 상언했다고 한다. >대장군 업후(鄴侯) 원소(袁紹)는 예전에 기주목 한복과 함께 전 대사마 유우(劉虞)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금새(金璽)를 만들고 전 임장(任長-거록군 임현 현장) 필유(畢瑜)를 유우에게 보내 명록(命錄)하기를 수차례 설득했습니다. > >또한 원소는 신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길, ‘가히 견성(鄄城)에 도읍할 만하니 응당 옹립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제멋대로 금인(金印), 은인(銀印)을 주조하니 효렴(孝廉), 계리(計吏)들이 모두 원소에게로 나아갔습니다. > >(원소의) 종제인 제음태수 원서(袁敍)는 원소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길, > >‘지금 해내(海內)가 무너지고 하늘의 뜻이 실로 우리 가문에 있어 신령이 감응하는 징조가 있으니 마땅히 존형(尊兄)에게 달려있는데, 남형(南兄-남쪽에 있는 형, 즉 원술)의 신하들이 즉위하기를 권하자 남형이 말하길, 나이로 보아도 북형(北兄)이 더 많고 지위로 보아도 북형이 더 중하다고 하고 곧 옥새를 (존형에게) 보내려 했으나 때마침 조조가 길을 끊었다’ > >고 했습니다. 원소의 종족(宗族)은 누대에 걸쳐 나라의 중은(重恩)을 입었으나 흉역 무도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병마를 이끌고 관도에서 어울려 싸웠는데, 성조(聖朝-조정)의 위엄에 힘입어 원소의 대장 순우경 등 8명을 참수하고 마침내 그들을 대파하여 궤멸시켰습니다. 원소와 그 아들 원담은 가벼운 차림으로 함께 달아났고 참수한 것이 모두 7만 여 급이고 (노획한) 치중과 재물은 거억(巨億-거액, 거량)입니다.” 또 조조는 원소의 서신을 얻고 모두 불태운다. 역시 무제기의 주석에 인용된 위씨춘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원소가 강성할 때는 나도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뭇 사람들이겠느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