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도대전 (문단 편집) == 199년의 상황 == * 별도로 출처 언급이 없는 모든 정사 기록들은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파성넷]]이 출처입니다. >4년(199년) 봄 2월, 공(公)이 환군해 창읍(昌邑-연주 산양군 창읍현)에 이르렀다. 장양(張楊)의 장수 양추(楊醜)가 장양을 죽이자 수고(眭固)가 양추를 죽이고는 그 무리들을 이끌고 원소에 붙어 사견(射犬-하내군 야왕현 일대)에 주둔했다. > >여름 4월, 진군하여 황하에 임하고, 사환(史渙), 조인(曹仁)에게 황하를 건너 이를 공격하도록 했다. 수고는 장양의 옛 장사(長史) 설홍(薛洪), 하내태수 무상(繆尙)을 남겨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원소를 영접하며 구원을 청하려 했다. 사환, 조인과 견성(犬城)에서 서로 조우해 교전하니 수고군을 대파하고 수고를 참수했다. 마침내 공(公)이 황하를 건너 사견(射犬)을 포위했다. 설홍, 무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열후에 봉하고 오창(敖倉)으로 환군했다. 위충(魏种)을 하내태수로 삼아 하북(河北)의 일을 맡겼다. > >이때 원소는 공손찬을 병합하여 4개 주를 차지하고 군사는 10여 만으로, 장차 진군하여 허도를 공격하려 했다. 제장들이 원소를 대적할 수 없다고 하자 공이 말했다, >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소. 뜻은 크나 지략이 부족하고 겉으로 사나운 척 하나 담력이 약하오. 질투심이 많고 각박해 위엄이 적고, 병사는 많으나 분획(分畫-부서와 임무의 구분)이 불분명하고, 장수들은 교만하여 정령(政令)이 통일되어 있지 않소. 비록 토지가 광대하고 양식이 풍족하나 오히려 우리에게 바치게 될 것이오.” > >가을 8월, 공이 여양(黎陽)으로 진군하여, 장패 등에게 청주로 들어가 제(齊), 북해(北海), 동안(東安)을 격파하게 하고 우금을 남겨 황하 가에 주둔시켰다. >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오면서 군을 나누어 관도(官渡)를 지키게 했다. > >겨울 11월, 장수(張繡)가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열후에 봉했다. > >12월, 공이 관도에 주둔했다. > >원술은 진(陳) 에서 패한 이후로 점차 곤궁해지자 원담(袁譚)이 청주(靑州)에서 사람을 보내 그를 맞이했다. 원술이 하비를 통해 북쪽으로 가려 하자 공이 유비(劉備), 주령(朱靈)을 보내 이를 요격하게 했다. 때마침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정욱, 곽가가 공(公)이 유비를 보냈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말했다, “유비를 놓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이에 공이 후회하고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 >유비는 동쪽으로 가기 전에 은밀히 동승(董承) 등과 함께 모반했었는데 하비에 도착하자 마침내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거병(擧兵)해 패(沛)에 주둔했다. 유대(劉岱), 왕충(王忠)을 보내 이를 공격케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 >5년(200년) 봄 정월, 동승(董承) 등의 모의가 누설되어 모두 복주(伏誅-형벌을 받아 주살됨)되었다. > >공이 장차 친히 동쪽으로 유비를 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바야흐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가시려 하니, 원소가 이를 틈타 우리 배후를 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 >공이 말했다, “무릇 유비는 인걸(人傑)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될 것이오. > >원소는 비록 뜻은 크지만 사세를 살피는 일에 더디니 필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 >곽가 또한 공에게 권하자 마침내 동쪽으로 유비를 쳐서 깨뜨리고 유비의 장수 하후박(夏侯博)을 사로잡았다. >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고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유비의 장수 관우는 하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다시 진격하여 공격하니 관우가 투항했다. 창희(昌豨)도 유비 편에 서서 모반했었으므로 또한 이를 공파(攻破)했다. 공이 관도(官渡)로 돌아왔고, 원소는 끝내 출병하지 않았다. >---- >『삼국지』 「무제기」 >건안 4년(199년) 봄 3월, 원소(袁紹)가 역경(易京)에서 공손찬(公孫瓚)을 공격해 그를 붙잡았다. > >위장군(衞將軍) 동승(董承)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 > >여름 6월, 원술(袁術)이 죽었다. > >건안 5년(200년) 봄 정월, 거기장군(車騎將軍) 동승(董承), 편장군(偏將軍) 왕복(王服), 월기교위(越騎校尉) 충집(种輯)이 조조(曹操)를 주살하라는 밀조(密詔)를 받았으나 일이 누설되었다. 임오일(9일), 조조가 동승(董承) 등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 >『후한서』 「효헌제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