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도대전 (문단 편집) === 수고 격파 === >별도로 사환(史渙), 조인(曹仁)과 함께, 사견(射犬-하내군 야왕현 일대)에서 수고(眭固)를 공격해 깨뜨리고 그를 참수했다. >---- >「우금전」 >그때 장양은 그의 장수 양추(楊醜)에게 피살되었으며, 장양의 장사(長史) 설홍(薛洪)과 하내태수(河內太守) 무상(繆尙)은 성을 굳게 지키고 원소의 구원을 기다렸다. 태조는 동소로 하여금 홀로 성안으로 들어가게끔 설홍과 유상을 설득하게 하니, 바로 그날에 무리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따라서 태조는 동소를 기주목(冀州牧)으로 삼았다. >---- >「동소전」 >장양의 대장 양추(楊醜)가 장양을 살해하고 조조에게 호응했지만, 장양의 장수 수고(眭固)는 양추를 살해해고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북방의 원소와 합류하려고 했다. 조조는 사환(史渙)을 파견하여 맞아 싸웠으며, 견성(犬城)에서 이들을 격파시키고 수고를 참수하였으며, 그의 군대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 >「장양전」 199년 2월, 장양의 부하인 양추가 장양을 죽이고 조조에 호응하려 했다. 하지만 또다른 장양의 부하인 수고(휴고)가 양추를 죽이고, 원소에게 호응하기 위해 사견에 주둔한다. 이에 조조는 수고를 정벌하고자 했다. 3월, 원소는 마침내 공손찬이 농성 중이던 역경을 무너뜨렸다. 4월, 조조는 진군하여 황하에 도착하고, 조인, 사환, 우금 등을 보내 사견을 공략했다. 수고를 죽이는데 성공한 후, 조조는 동소를 보내 설홍과 무상을 설득했고, 설홍과 무상은 결국 항복한다. 원소는 공손찬을 무너뜨린 이후임에도 자기에게 우호적인 수고를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태조가 처음 원소를 정벌할 때 원소의 병력이 강성했으나 우금은 선봉이 되기를 자원했다. 태조가 이를 장하게 여기고 보졸 2천 명을 주어 이끌게 했다. 우금은 연진(延津-황하 나루터. 진류군 산조현 북쪽)을 지키며 원소와 맞섰고 태조는 군을 이끌고 관도(官渡)로 돌아갔다. >---- >「우금전」 가을, 조조는 우금을 연진에 주둔시키고 관도로 돌아갔다. 한편 청주에서는 장패가 제(齊), 북해(北海), 동안(東安)을 공격하였는데, 이 덕분에 조조는 청주 방면은 전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