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도대전 (문단 편집) === 우금의 활약 === >또한 악진 등과 함께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5천을 이끌고 원소의 별영(別營)을 들이치고, 연진 남서쪽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급(汲-하내군 급현), 획가(獲嘉-하내군 획가현)의 2현에 이르기까지 보취(保聚) 30여 둔(屯)을 불사르고 적군을 참수하고 사로잡은 것이 각각 수 천에 이르렀고, 원소의 장수 하무(何茂), 왕마(王摩) 등 2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 >태조는 다시 우금을 보내 별도로 군을 이끌고 원무(原武-하남군 원무현)에 주둔시켰는데, 두씨진(杜氏津)에 있던 원소의 별영(別營)을 격파했다. 비장군(裨將軍)으로 올렸다. >---- >「우금전」 유비를 정벌하고 돌아온 후,[* 악진전에 조조를 수행해 유비를 정벌한 이후에 우금과 함께 획가와 급을 공격했다고 나온다.] 조조는 오히려 우금과 악진을 보내 황하 서쪽의 급현, 획가현 일대를 공격하여 30여 둔을 불사르고 장수 20여명의 항복을 받았으며, 우금은 별도로 원무에 주둔하며 두씨진에 있던 원소의 별영을 격파했다. 다만 200년 정월에 유비를 공격했다가 돌아오고 2월부터 원소는 백마를 공격했는데 그 사이 시간이 촉박하다. 우금전의 기록은 우금이 연진에서 원소군을 막은 후 원소군을 공격했다고 하는데, 이때 연진에서 벌어진 전투가 문추가 죽은 전투라고 한다면 이 기록은 4월에서 8월까지 벌어진 일이 된다. 조조는 백마/연진에서 원소군의 예기를 꺾은 후 바로 관도까지 후퇴했는데, 이 시기에 우금과 악진을 보내 하내를 정리한 것이다. 그러면 악진과 우금이 하내를 공략한 시점은 세가지 경우가 있다. 1. 정월과 2월 사이에 한 일이다.[* 시간이 촉박하고 조조와 원소가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이라 가능성은 낮다.] 2. 조조가 백마를 구원하는 시점이 4월이므로 2월과 4월 사이에 하내를 정리한 것이다. 3. 연진 전투와 관도 전투 사이에 하내를 정리한 것이다. 유비 정벌과 관도 전투 사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시점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