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동대학살 (문단 편집) == 일본인 사회주의자 학살 == [[일본군]] 및 [[일본제국 경찰]]의 학살 직접 참여 사례는 대부분 조선인 학살을 틈타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 및 [[일본 제국 육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대에 요주의 대상으로 등록된 (주로 좌파 계열인) 운동가를 죽이고자 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상은 집단 광기의 분위기에 편승해 학살에 참여한 것이 대다수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학살된 반면 사회주의자들이 당국으로부터 검거된 시점은 9월 3일과 4일 이후부터였으며 이전까지는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히라사와 게이시치나 야마기시 사네지, 스즈키 나오가즈, 가와사키 진이치, 요시무라 고지, 가와이 요시토라 등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발적으로 자경단에 가입해 조선인을 경계하는 업무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지진 당시 반전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성향의 [[기독교]]인인 우치무라 간조조차 자경단과 함께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는 몽둥이를 들고 집 주변에서 경계를 섰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자 그를 믿고 따랐던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이 실망하거나 분노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유명한 사회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도 9월 16일 육군 헌병 대위인 [[아마카스 마사히코]]에게 체포되어 도쿄헌병대 구내에서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자경단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여동생의 집에 놀러갈 만큼 자유롭게 지냈다. 게다가 일본 민중들은 사회주의자가 범죄를 일으킨다는 [[일본 정부]]가 퍼뜨린 유언비어를 믿지 않고 정부를 비판했으며 군인이나 경찰에 검거되거나 피살당한 사회주의자들을 동정했다. 아울러 피살되거나 검거된 사회주의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정부를 상대로 진상 조사와 책임 추궁을 강하게 요구하고 항의했다. 그 결과 오스기를 죽인 아마카스는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죽임을 당한 오스기와 이토 노에, 다치바나 무네카즈 등의 유골은 유족들에게 모두 인도되었다.[*출처: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저/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이 중 무정부주의자로 유명한 인사였던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는 헌병대에 의해서 일가가 참살되고 우물에 던져졌다([[아마카스 사건]]). 이 사건의 책임자는 아마카스 대위이며 이 사건으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뒤 만주국으로 건너가 여러 정치공작과 선전활동(주로 영화 제작)에 가담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사카모토 류이치]]가 열연한 인물이 바로 이 사람. 또한 이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알아주는 문제 중 하나인 [[천황]]의 통수권 문제가 두드러지면서 법리적인 근거를 얻게 된다. 바로 '''천황의 대리인으로서 임무에 나선 군인의 책임을 묻는 것은 천황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같다'''는 논리로 변론한 것. 이전에도 이미 군 통수권 행사에서 군의 독주는 어느 정도 확장되고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이제 일개 대위조차도 천황의 권위를 등에 업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긴 셈이었다.[* 재판 자체에서는 당장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으나 이후 종범들을 대상으로 열린 별도 재판에서 이 논리가 제기되면서 병사들은 완전 무죄 방면되었고 장교들의 지휘책임 역시 묵살되었다. 이후 이 상황을 신병 정신교육 시간에 강조하면서 '''병사는 무조건 천황의 대리인 장교의 명령에 천황의 명을 받들듯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교육했다. 이는 훗날 [[2.26 사건]] 등의 군사반란 상황에서조차 장교의 명령에는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로 비화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