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상 (문단 편집) == [[서양]]에서의 관상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구권|서구]]에도 있었다. [[서양]]에서 관상은 문명이 발생한 시기와 비슷한 때에 생겨났다. 기원전 2000년 메소포타미아 유적에선 ‘어깨에 곱슬곱슬한 털이 난 남자에게는 여자들이 따를 것이다’라는 식의 내용이 적힌 관상학 핸드북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에는 자연현상을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에 비정상적인 신체 특징이나 움직임에서 그 원인을 찾고 인간의 미래를 읽고자 했다. 이 시기에는 이처럼 어떤 일이 생긴 이유를 신체에 새겨진 운명 탓으로 돌리는 ‘예언적 관상’이 주를 이뤘으며, 동아시아의 관상과 흡사한 점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생김새를 유형별로 나눠 인간의 성격을 해석하는 ‘분석적 관상’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관상은 종교나 신비적 성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과학으로 자리잡아갔다. 타고난 신체가 성격을 말해주지만, 이러한 성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과 닮은 동물의 대표적인 특질로 관상을 해석했다. ‘이마가 좁은 것은 돼지에서 보듯 멍청함을 나타내고, 사각으로 균형 잡힌 이마는 사자처럼 자존심이 강하다’는 식이다. 로마 시대에는 황제의 관상을 신화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서기 122년에 출간된 ‘황제전’은 로마의 폭군 칼리굴라(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외모 자체에서 호감을 주지 않는다고 묘사한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균형 잡힌 골격을 갖고 있다’고 서술했다. 이는 권력을 잡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이상적인 관상에 일치시켜 대중에게 널리 알리려는 시도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고정된 생김새에서 표정과 동작으로 관심이 이동하고, 타고난 운명보다 자율적 의지가 더 중요해졌다. ‘관상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이런 변화는 신분상승이 활발해진 사회 분위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에는 옷 밖으로 드러난 얼굴과 손이 관상의 중요한 대상으로 부각됐다. 얼굴의 주름을 보고 인간형을 구분하는 면상학(metoposcopy), 사람의 얼굴을 관찰하여 특성을 살펴보는 관상학(physiognomy)이 있었다. 동양 관상학에서 사람의 얼굴을 동물이나 오행론에 기초하여 표현하듯이, 서양의 면상학/관상학에서도 동물이나 점성술의 일곱 별(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동양의 관상학과 달리, 유럽식 면상학과 관상학은 운명을 점치는 단계로까지 비약하지는 않고 개인의 성격이나 특성을 설명하는 정도에 그쳤다. [[파일:external/1.bp.blogspot.com/Cardan_0001.jpg|width=300]] 제놈 카르다노의 저서 <면상학>에 실린 면상학 그림.([[http://whiteknightstudio.blogspot.kr/2015/09/whos-line-is-it-anyway-art-of.html|출처]]) 각 주름은 점성술의 일곱 별에 대응되며, 각 주름의 위치와 모양에 따라 다른 운명을 나타낸다고 본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8px-Porta59.jpg|width=300]] 동물에 빗대여 관상을 설명하는 근세 유럽 관상학 서적 그림.([[https://en.wikipedia.org/wiki/Physiognomy|출처: 위키백과]]) 얼굴의 크기와 남성 호르몬의 연관 관계가 논문으로 나와 있다. 관상으로 사람의 삶을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얼굴 형태와 성격이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007/s40750-014-0003-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