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 (문단 편집) === 기년 수정론 ===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대무신왕|대주류왕]]께서 국가의 기초를 이어받으신 후 17세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8세에 등극하니 부르길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돌아가셨다. >----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의 탄생년도에 대해서는 능비를 통해 추론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가 있고, 또 사망연대와 맞춰 볼 때도 의아한 점이 있어 학계에 이론이 있다. 학계의 중론은 대체로 374년인 듯하나, 37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능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18세 되던 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 설은 즉위년에 대한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즉위한 것이 되는데, 연표에 따르면 이 해는 바로 임진년이다. 그런데 능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을 391년이라고[* 단순히 역산해서 391년, 신묘년이라고 추산하는 것이지, 고구려인들이 오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신묘년'에 즉위했다는 소리가 없고, 18살에 즉위했으며 412년에 승하했으니 391년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하고 있다. 릉비는 60갑자와 왕의 연호를 병기하고 있으므로, 릉비를 만든 고구려인들이 착각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영락 5년 을미(395년)', '영락 6년 병신(396년)' 등으로 정벌 기록마다 확인이 되고, 덕흥리 고분 등에서 교차 검증도 되는 사실이다. 반면에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왕의 연호만 이용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김부식이 사서나 문헌을 인용할 때 오산했는지 추적이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주류 학계에서는 능비문에 《삼국사기》를 맞추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 해 앞당김으로서 광개토대왕이 신묘년 즉 391년에 즉위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즉위년만 앞당기게 되면 광개토대왕의 재위년 자체가 23년으로 40세에[* 그러나 이 또한 《삼국사기》의 일괄적인 1년 오류라고 해석한다면 문제는 전부 소거 되고, 광개토왕은 39세에 사망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당대에 고구려인들에 의해 세워진 1차 사료인 금석문이 버젓이 12세기에 신라인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대치되고 있다. 무엇을 더 신뢰해야 할까? 릉비를 토대로 복원한 그의 치세는 고구려인들의 당대 관습이었던 [[삼년상]]으로도 뒷바침된다] 사망한 것이 되어 《삼국사기》 본래의 기록은 물론이고, 능비와도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며[[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2KKR_A0374_1_0000621|#]], 혹시 전체 재위년을 한 해씩 당겨서 391년 즉위해 412년 사망한 것으로 한다면 중국 사서와 교차 검증되는 《삼국사기》의 연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문제점이 생긴다.[* 《일본서기》에서도 '''이주갑인상'''을 고려한 년도는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와 같다. e.g. 진사왕의 죽음, 아신왕의 즉위 등.][[http://100.naver.com/100.nhn?docid=18490|#]] 그러나 연표가 중국 사서와 교차검증된다는 것은 중국 사서에서 전하는 한반도 관련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받아쓰기했기 때문에 일치하는 것이다. 국내 전승이나 문헌에서만 확인가능한 국내 관련 기록과 기사를 인용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각에서 '사서의 연도에 능비의 [[갑자|간지(干支)]]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도 한국 고대사에서 유일하게 [[삼국사기|잘 정리된 연표]]의 간지를 무시하고 연대를 끼워맞춰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양 사료 간에 미묘하게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간지와 연호를 병기하고 있으므로 당대에 고구려인들이 년도에 착오가 있었다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릉비 기록에 《삼국사기》를 끼워맞추는게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e.g. 병신년 = 396년 etc.) 그러던 중 광개토왕릉비의 기년 문제에 대해 의문을 해소해줄 유물이 2004년에 중국 집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청동 방울에는 '호태왕 신묘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로 광개토대왕의 원년은 신묘년(391)년이거나 그 이전이라는게 중론이 되었다. 다시 말해 적어도 391년 = 신묘년이나 그 이전에 광개토왕이 즉위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최소한'[* 사망기사에 대한 1년 격절은 후술한다.] 광개토왕의 392년 즉위 기사가 오기되었다는 증거로 작용하는 셈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283056|#]] 상식적으로 년도가 기록되어 있는 유물이라면 해당 년도에 만들어졌을 공산이 크므로 오기했을리가 없다. 고로 광개토왕릉비의 기년 오기 문제 제기는 자연스럽게 소거된다. [[파일:호태왕:신묘년.jpg]] [[파일:호태왕:신묘년2.jpg]] 이상의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능비의 '신라 구원 요청(9년 기해) - 신라 구원군 파견('''10년 경자''')'에 비정되는 《삼국사기》의 '신라 내구마 울음('''9년 경자''') - 실성 귀환(10년 신축)'을 굵은 글씨에 주목하며 비교해보자. 추측의 영역이지만, 내물 마립간의 울음은 왜구에 의한 왜란을 비유적으로 표현 했다고 추론 할수 있다. 그렇다면 릉비 9년에 내물 마립간이 사신을 보내어 대왕께 스스로 신민이 되겠다고 언약한 것과 같은 사건으로 볼수 있으며, 이듬해 대왕이 실성과 함께 신라 구원전에 참여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7월에 실성이 귀환했다고 하는데, 왜구는 알다시피 여름에 계절풍을 이용해 약취해 겨울에 훈풍을 타고 도망가는 존재였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 또한 〈고구려본기〉와 같이 1년씩 일괄적으로 마루면, 서로 부합하는 측면도 있다. 혹자들은 이 차이가 칭원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칭원법'''은 간단히 말해서 선왕이 승하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그 해를 새로운 왕의 원년으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이 해를 선왕의 마지막 연호로 보고, 그 이듬해를 새로운 왕이 즉위한 원년으로 볼 것이냐이다. 또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이 승하한지 3년이 되는 해에 이장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릉비의 기록대로 역산한 광개토대왕의 사망년도는 412년. 그리고 릉비에서 기록한 414년에는 릉을 이전하고 릉비를 건립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을 3년 동안[* 말만 3년이지 실제로는 24개월이다. 고대 동양에서는 0의 개념이 없었다. 고로 3년은 만 3년이 아니라 햇수의 개념이었다.]상을 치뤘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사서에는 고구려인들이 부모가 죽었을때 3년상을 치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릉비에 맞추어 일괄적으로 그의 치세를 모두 1년씩 당겨 온다면, 릉비에서 증언하는 릉비의 이장 기록은 광개토왕이 승하한지 딱 24개월 차이가 난다. 또, 이를 토대로 복원한 광개토왕의 생몰년도(374년~412년)와 치세기 391년~412년은 세는 나이 기준[* 18세에 즉위했고, 39세에 사망했다고 하니깐, 딱 각각 391년 412년이다]으로 정확히 릉비의 기록과 맞아 떨어진다. 이를 본다면 릉비의 기록이 《삼국사기》보다 더 정확하고 디테일함을 알 수 있고,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년도를 오산해서 향년 (태어난 년도와 승하한 년도)을 오기 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곧 무덤을 만들고,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시신을 모시며 삼년상(혹은 24개월)을 지낸 뒤 좋은 날을 잡아 장사를 지내고 그 후에 시신을 무덤에 안치한다고 기록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10월에 사망했다고 기록 되어 있고, 릉묘를 이전한 날짜는 3년후인 (만 24개월) 9월 29일이었다. 그 당시에도 만 24개월 ~ 27 개월동안 상을 치뤘다는 사례는 (물론 훨씬 후대이긴 하지만) 백제 [[무령왕]]과 그의 왕비의 경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1년 늦다는 학설에 힘이 실린다. >死者, 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墓側, 會葬者爭取而去. >사람이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 자가 태어났을 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 >《북사》 〈열전〉 '고려'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광개토태왕은)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39세([[412년]])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이후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능을 옮겨 모셨다. >---- >〈광개토대왕릉비문〉 국책사업으로 편찬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석도 이러하다 >능비는 광개토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 3년 9월에 대왕의 능과 함께 건립되었다(종래에는 《삼국사기》의 기년에 따라 414년을 장수왕 2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유월칭원법'''을 사용하였던 까닭에 광개토왕이 죽은 412년은 곧 장수왕 원년이 된다. 따라서 비가 건립된 414년은 장수왕 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5058|#]]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의 모든 기록을 1년 올려 해석할 순 없다. [[전연]]과의 전쟁 기록은 《[[자치통감]]》에서 비롯됐고 백제와의 전쟁 기록이 백제 측 전승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나타나는 이 일괄적이고 기계적인[* 왕이 즉위한 년도부터 승하한 년도까지 계속 1년 차이가 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오류를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되며,[* 실제로 《삼국사기》 392년의 백제 정벌 기록을 보면, 같은 사건을 서술한 〈백제본기〉보다 〈고구려본기〉가 더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으므로, 고구려 전승일 경우가 크며, 그렇게 되면 392년이 아니라 광개토왕의 원년인 391년으로 보는 게 일견 합리적인 해석이다.] 꼭 교차검증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사료 비판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단순 즉위년도나 사망년도에 대한 단편적인 기사에서 생기는 오류가 아니라, 즉위 기사부터 승하 기사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391~412년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이미 김부식 손에 의해 편년 작업을 할 때 392~413년 동안에 일어났던 사실인양 일괄적으로 욱여넣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첫 단추인 즉위기사부터 1년씩 잘못 끼웠으니, 나머지 후술되는 고구려 전승의 기사들에서 만큼은 광개토왕이 사망할 때까지 편년 작업이 꼬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릉비의 기록을 실제 대왕의 치세기로 파악하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김부식의 착오로 인해 혹은 칭원법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을 착각했기 때문에 1년씩 밀려썼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비문을 포함한 다른 기록을 종합할 때 장수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18세에 지나지 않아 왕으로서의 본격적인 권위를 발휘하기 대단히 힘들었다고 판단되다. 이런 그가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이 비를 세울 당시에는 21세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에서는 선왕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장수왕은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바로 그때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 이 비를 세우는 그 시점에서 진정한 고구려왕으로 등극했다고 할 수 있다. >---- >廣開土王碑,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 김태식[* 홍익대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과 동명이인의 역사 전문 기자이다.]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288498545|#]] 주보돈 교수 또한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왕이 죽고 삼년상을 치뤘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60412/77532701/1|#]] 왜 칭원법에서 기인한 차이가 생겼냐에 대한 추론은 고국양왕이 광개토왕에게 생전에 양위했기 때문에, 유교의 예법으로 최대한 선왕의 치세기를 존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속사정도 모른채 김부식은 유월칭원법으로 작성된 문헌이라고 가정한채, 그대로 받아적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민족주의 사학자 [[김석형]] 등도 〈고구려본기〉 392년(광개토왕 원년)에 기록되어 있는 관미성 함락 기사를 391년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주장을 제시했고, 이와 연개해서 릉비에 기록된 신묘년의 신민의 주체를 고구려로 해석하는 등의 학설을 제기했다.[* 출처: 김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1966,298쪽] 광개토대왕릉비 해석에 일생을 바친 다케다 유키오 도쿄대 동양사학과 학장도 관미성 함락 기사는 392년이 아닌 391년이 유력하다는 취지의 논문을 썼다.[* 겨울 10월에 … 빼앗았다 :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6 광개토왕 즉위년(391)조에는 고구려군이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고 하여 보다 상세하게 나온다. 관미성이 함락된 시기는 본 기사에 진사왕 8년(392)으로 나오나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원년(391)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난다. 이는 '''즉위년 칭원법'''과 '''유년칭원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동일한 기사이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관미성이 영락(永樂) 6년(396)에 광개토왕이 백제를 쳐서 함락시킨 58성 중의 하나로 나와 본 기사와 5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광개토왕릉비」에서 광개토왕의 백제 정복을 영락 6년(396)조에 일괄적으로 기록한 것에서 빚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광개토왕의 정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즉위년인 신묘년(391) 기사가 전치구로 강조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武田幸男, 271~273쪽; 李基東, 49~52쪽).] 따라서 결론은 왕이 사망한 년도는 릉비에 기록된 412년이 맞고, 생년은 새는 나이로 39살에 죽었다고 하니, 374년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10월에 왕이 죽었다는 기사는 412년을 413년으로 오기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사서의 고구려인들의 장례 풍습이 뒷바침한다. 즉위 원년은 1차 사료인 릉비가 증언하는 391년이며, 다른 1차 사료인 청동 방울에서도 교차 확인 가능하다. 《삼국사기》가 1년씩 밀려써서 생몰년도와 치세기가 1년씩 어긋난다는 결론은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