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 (문단 편집) === 사료적 측면 ===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사료(역사)|사료]]로는 금석문으로는 〈[[광개토대왕릉비]]〉, 문헌으로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를 중심으로 여러 사료들이 전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현전하는 [[한국]] 고대의 비문들 중 내용이 비교적 온전히 전해지는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로, 당대 [[역사]]를 전하는 내용이 많아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부터 [[사망]]까지 [[고구려]]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대순으로 서술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료이다. 중국 사서는 광개토대왕 시기 [[모용선비]]족의 [[후연]]과 고구려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했다. 이외에도 《[[삼국유사]]》나 《[[일본서기]]》에 단편적인 사건들이 전하고 운좋게 살아남은 〈[[모두루]] 묘지명〉과 [[호우총|호우명 그릇]]은 지워진 역사의 편린을 전해주고 있다. 광개토대왕 시기 사료는 [[한국사]] 전반에 걸쳐서 보면 적지만 한국 고대사로 한정한다면 매우 풍부한 편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광개토대왕 시기의 [[통치]]와 [[전쟁]] 기록이 고구려의 다른 [[왕]]들 기록보다 많고, [[고고학]] 발굴 성과도 광개토대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무엇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남아 있다는 점이 크다. 사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뒤 한참 동안 잊혀졌고, 재조명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이루워졌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근초고왕]]이나 [[진흥왕]]과 비슷한 수준의 [[정복왕|정복 군주]]로 평가되어 [[수나라]]에 맞선 [[영양왕]]이 훨씬 높게 평가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었던 [[압록강]] 이북의 경우에는 [[발해]] 멸망 이후로 이민족 국가의 영토였던 데다가 특히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로 봉금령으로 인해서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채 [[금나라]] 황제가 세운 비석 정도로 여겨져서 재조명이 늦게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문화재]]가 다른 것으로 오해받은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일례로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진흥왕 순수비]]가 [[무학대사]]비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해당 시기에 조선이 여러 [[강대국]]들과 얽히면서 외세의 침탈에 시달렸던 때였기도 했고, 그동안 [[삼전도의 굴욕]]을 씻어내지도 못했던지라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재조명되기에 시기적으로 타이밍이 맞았다. 당연히 [[민족주의]]적 자긍심 고취의 관점에서 다시 부각된 측면이 크다. 물론 비문이 발표되는 과정에서 [[일본군]]이 개입해서 의도적으로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내놓았지만, 근본적인 해석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 때문에 고구려가 망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광개토대왕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끽해봤자 고구려의 왕들 가운데 1명으로 소개되면서 특징으로 싸움을 잘했다거나 땅을 넓혔다고 언급되는 것이 전부였다. [[역사서]]에서는 광개토대왕을 주로 [[무인]]의 기질이 있고 웅대한 [[야망]]을 품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가운데 그나마 재미있는 것은 두 조선 [[문인]]들의 평가이다. 14세기에 [[권근]]은 《[[삼국사절요]]》에서 '3년상도 다 안 치른 채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고 [[복수]]한답시고 지난 일이나 들추는 몹쓸 사람'이라 평가했고[* 다만 광개토대왕은 어차피 어릴 적에 [[백제]]에 이 박박 가는 큰아버지 [[소수림왕]]과 아버지 [[고국양왕]]을 보고 자랐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성리학]] 따위가 있을 리도 없었던데다 [[유교]] 개념 자체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도 않았다. 요즘 관점으로 과거사를 이해하면 안되듯이 권근도 똑같은 잘못했다. 그리고 이 오류는 권근을 비판한 안정복도 행했다. 그렇지만 그 둘을 옹호해주자면 당대의 가치관이 당대에는 최고의 가치관으로 여겨지는게 일반적이기는 하다는 점 정도. 고대의 인물에게 성리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물론 평가는 평가하는 이의 잣대가 기준이니 아주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대가 1,000년 가까이 전인 인물에게 저런 잣대로만 잰 것은 문제다. [[막말]]로 저 시대에 3년상이 뭔지 관심이나 있었겠는가? 물론 당시 고대 [[국가]]에서 [[장례]] 기간이 길었음을 감안하면 정말로 광개토대왕이 장례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전사한 후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이를 갚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결실도 못 보고 죽었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보면 어떻게든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필요하기는 했다. 여담으로 《[[태평어람]]》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고구려인들은 100일 동안 상을 치렀다(停喪百日)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조선 중기 이후의 [[유학자]]들이 저 말을 들었다면 되레 헛[[방귀]]를 꼈을지도 모른다. [[주자(철학자)|주자]]는 "복수는 5대까지는 해야 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권근의 말은 주자의 말과 완전히 대비되므로 어떻게 보면 [[영구까임권]]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듯. 여기에 그냥 권근이 살던 조선 [[건국]] 시기에만 봐도 말이 안되는 주장인데 3년상은 고행이 뒤따라서 권근은 3년상을 안 치르고 전쟁하냐고 비판했지만 정작 조선 왕들 중에서 제대로 3년상을 치른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적국으로 [[포위]]당해 있던 고구려 사정상 3년상이고 뭐고 당장 살아가는게 급할 지경이었다. 당장에 광개토대왕 즉위 1년 전 백제의 [[진사왕]]이 쳐들어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18세기]] [[안정복]]은 '고작 22년밖에 안 지난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는데 그게 바로 도리'라는 주장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야사(역사)|야사]]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거의 [[출처]] 불명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종종 [[정사(역사)|정사]]인 것마냥 소개되고 있다는 건데 요즘은 예전에 비하여 한국 고대사가 많이 정립되면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상대적으로 [[학술]]적 접근이 관철되지 못한 [[동화]]책에는 이런 내용이 넘쳐나고 있다. 사실 동화 [[작가]]들이 지어낸게 설화마냥 퍼져나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설화로는 광개토대왕이 [[여자]] 때문에 싸움이 난 두 마을을 화해시켜 줬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위서 《[[환단고기]]》에도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는데 의외로 중원을 호령하고 어쩌고 하는 내용은 없다. [[선비족|선비]]계인 [[후연]]이나 [[만주]] 대륙의 국가들과의 싸움은 없고, [[일본|왜]]와 연결되어 있는 [[한반도]]를 공격하는 내용인데... 이 기록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 참고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광개토호열제'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 야사나 다름없는 《[[조선상고사]]》에도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대표 업적으로 생각하는 [[대륙]]으로의 진출보다는 [[왜군]]과의 격돌에 비중을 두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자로 유명한 [[박창화]]가 남긴 다른 책 《고구려 사초》의 〈영락대제기〉도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다루고 있는데 자잘한 내정 기록, [[왕실]] 비사 등을 제외하면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고, 정사로 통용되는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정복 전쟁과 관련해서는 [[탐라국]]이 항복했다는 것 말고는 새로운 것이 거의 없는데, 〈[[광개토대왕릉비]]〉나 《[[삼국사기]]》 같은 정사로 통용되는 사료의 기록을 살짝 비틀어놓거나 [[전투]] 기록을 1줄 더 추가한 게 전부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탐라국|탐라]]가 [[항복]]했다는 내용과 [[거란]]과의 전투 기록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기존의 사료에 존재하는 내용들이다.[*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 대에 활동했던 것이 확실한 진이나 모두루가 《고구려 사초》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소설]]일 가능성도 높다. [[진(고구려)|진]], [[모두루]] 모두 박창화 사후에 확인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비려'의 위치나 정체에 대해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몽골]]의 [[유연]]이라고 했으나 근거 자체가 해괴하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부산 밑에 와룡이 있었는데 와룡이 유연의 별칭인 유유와 발음이 비슷하니 와려(비려)는 유연인 것 같다.'라는 게 근거이다.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3%81%EA%B3%A0%EC%82%AC/%EC%A0%9C7%ED%8E%B8#.EA.B4.91.EA.B0.9C.ED.86.A0.EB.8C.80.EC.99.95.EC.9D.98_.E5.8C.97.E8.A8.8E.E5.8D.97.E5.BE.81.28.EB.B6.81.ED.86.A0.EB.82.A8.EC.A0.95.29.EC.9D.98_.EC.8B.9C.EC.B4.88|#]]] 신채호가 해괴한 추론을 가끔 하기는 하지만 이건 매우 극악한 편에 속한다.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시라무렌 강 상류에 위치한 세력으로 훗날 비려가 [[거란]]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고는 한다. 이 때 토벌한 비려를 391년 [[토벌]]한 거란과 같은 존재로 보기도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광개토대왕 때 상대한 [[적]]들은 모두 기재했다는 가설에 의하면 거란이라고 빠뜨렸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비려는 거란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다. 더구나 비려는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에 의하면 거란이 위치해 있던 곳에 있었다. 다만 이러한 내용을 딱히 실증할 만한 뚜렷한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주요 근거는 비려와 거란의 위치가 비슷한 것 같고 거란의 [[부족]] 중에 필혈부가 있었는데 비려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위서]]》에는 '필혈부라고도 읽는 필결부(匹絜部)·려부(黎部)', 《[[통전]]》에는 '필려부(匹黎部)', 《[[북사]]》에는 다시 '필결부(匹潔部)·려부(黎部)'라고 적혀 있는데[* 애시당초 ㄱ음과 ㅎ음이 유사한 거야 주지의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몽골어]]의 '칸'과 [[여진어]]의 '한'이 있고, '우랑카이'는 중국에서 '우랑하이'라 불렀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올량합'(兀良哈)으로 적혀 있다.] 근데 이건 아예 당시부터 물길의 '필려이국'과 헷갈리고 있었으니 더구나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당장 [[고구려]]를 의미하는 '무구리'와 '말갈'만 해도 발음이 비슷한데 완전히 남남인 것을 보면 발음이 비슷한데 남남인 경우가 매우 흔하다. 비려와의 [[전쟁]]터였던 부산, 염수 등의 위치를 재현하면 대강 실마리가 잡히겠으나 그마저도 힘든게 현실이다. '염수'가 고유 명사일 수도 있고, [[소금]]이 많이 나서 붙은 이름일 수도 있는데 [[만주]] 지방에 소금이 나는 곳이 한둘인가? '부산' 같은 경우도 고유 명사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고구려인들이 이름 모르는 산을 '아무개'라고 부르거나 '큰 산'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비려는 고구려 [[국경]]에 근접한 거란을 먼저 토벌한 점이나 〈광개토대왕비문〉에 장거리 [[원정]]이 있었던 것마냥 기술한 점으로 보아 거란보다 서쪽의 [[내몽골]] 어딘가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신채호]]가 주장한 유연설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 셈이다. 어쩌면 유연에 복속한 부족일 가능성도 높다. 아니면 《진서》 〈동이전〉에 기술되어 있는 만주 중앙에 위치한 '비리국'일 수도 있는데, 《진서》가 광개토대왕 시기를 기록하고 있고 《진서》 〈동이전〉에서 서술하는 비리국의 위치가 〈광개토대왕비문〉의 비려처럼 고구려의 북쪽 어딘가이기 때문에 비리국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비리국이 광개토대왕 시기인 《진서》 〈동이전〉에만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도 묘한데 광개토대왕 치세에 고구려에게 먹혀서 이후로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뭐 [[한국]] 학계에서는 이 주장이 사장되기는 했다. [[중국]] 학계에서는 [[요동]]의 태자하 상류의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헌데 '태자하 상류설'이 말이 안되는게 광개토대왕이 비려를 격파하고 돌아오며 태자하를 거쳤으므로 성립하기 어렵다. 비려의 [[인구]]는 35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참고.] 기껏 3개 부락을 격파했는데 어떻게 35만이라는 [[숫자]]가 나오는지 의아할 수 있는데, 부락이라는 단위는 고정된 수치를 갖고 있는게 아니라 쓰일 때마다 다르다. [[마을]]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고 [[부족]]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다. 근데 이것도 비문의 판독에 따라 부락이 아니라 부(부족)로 판독할 수도 있어서 참 애매하다. 3개 부의 의미를 부족이나 부락 3개를 격파했다는게 아니라 거란족이 스스로를 칭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3개 부라는 의미로 해석한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그건 훨씬 후대의 일이다. [[396년]]에 점령한 백제의 58성 700촌은 대강 현재의 [[강원도]], [[충청북도]]와 [[경기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58성 700촌의 위치 비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일각에서는 [[충청남도]]까지 남하한 걸로 보기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충주 고구려비]]가 397년에 세워진 것이 맞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비류백제]]설로 이어지고는 하니 문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