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생애 (문단 편집) === [[신라-왜 전쟁|신라 구원]]과 백제ㆍ왜ㆍ가야 격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왜 전쟁)]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라 호우명 그릇.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호우명 그릇 탁본.jpg|width=100%]]}}}|| || {{{#000,#fff {{{-1 경주 출토 호우명 그릇과 그 탁본.[br]장수왕 시기[* 을묘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장수왕 3년인 [[415년]]을 말한다.] 고구려가 신라에게 하사한 것이다.[* 소설가 [[최인호(작가)|최인호]]는 만주 등지를 뒤집고 다니며 연구한 끝에 저 호우명 그릇 바닥의 상단에서 보이는 [[#]] 무늬가 광개토대왕의 문장이라고 추측해내었다. 그리고 최인호 작가는 중국 입국 금지를 당했다. [[지못미]].][* 저 # 무늬의 정체는 아직도 불명이다. 최인호는 저것을 [[백두산 천지]]를 상징하며 광개토대왕의 시대를 상징하는 무늬로 추측하긴 했으나 학계에서는 이를 정설로 보지 않는다. 이 외에 첫 발굴 보고서에서 나온 바와 같이 빈 공간을 채워놓기 위한 무늬라는 설과 다른 유물들에서도 의미가 없는 글자들이 발견됨에 따라 제조한 이의 서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 399년, 백제에서는 아신왕이 다시 한 번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지만 백성들이 이젠 고구려와 전쟁을 해도 개죽음이란 걸 알았는지 징집을 피해 신라, 왜, 가야, 고구려, 동진, 후연 등 주변국으로 달아나 버려 군사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달아난 백성들 가운데 유즈키노키미(弓月君, 궁월군, ゆづきのきみ)[* 백제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건 본명이 아닌 존칭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도래인 씨족인 하타씨(秦氏, 진씨)의 선조로 여겨지고 있는데 아마도 이로 인해 존칭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신찬성씨록》에서 [[시황제|진시황]]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어 실존 인물이 아닌 하타씨로 인해 추존된 전설상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를 필두로 한 일부는 다시 왜로 건너가려고 했지만 신라에게 저지당했다고 보기도 한다.[* 신라에서 이들이 왜로 이주하려는 걸 막아버린 덕분에 백제·신라·가야·왜 사이에서 글로벌한 분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이후 400년 국제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고구려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백제는 일단 고구려 대신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는 신라부터 정리하기로 생각해, 맹서[* 396년에 아신왕이 항복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를 어긴 채 [[왜]]와 화통하게 되었고, 마침내 백제 주도로 끌어들인 왜가 신라를 침공하며, 가야까지 같이 신라를 침략했다. 영락 9년, 세 나라의 움직임을 감지했기 때문인지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행차하고 있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서 세 나라의 침공을 받았다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사신에게 밀계(密計)를 알려준 뒤 돌려보내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인지 [[후연]]으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지만[* 398년에 모용성이 모용보를 시해한 난한을 몰아내고 '황제'로 등극했는데, 이해 설날에 자신을 '천왕'으로 낮추었다. 이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모용성]]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고 사신이 무례하다는 핑계를 잡아 그대로 신성과 남소성을 점령해 버렸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그 와중에도 [[보병]]과 [[기병]] 50,000명의 대군을 편성하여 신라로 보냈다.[* 후연에게 북방이 파괴된 와중에도 50,000명의 대군을 남쪽으로 파견한 것은 400년 초에 지원군이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연이 침공하여 군을 되돌릴 상황이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고구려군은 남거성에서부터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몰아내며 신라성까지 이르렀고, 연합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패퇴하자 이를 추격해 임나가라([[가야]])의 종발성[* 지금의 [[김해]] 지역, 즉 [[금관가야]]의 요충지나 다름없다.]까지 이르러 성을 항복시켰다. 항복시킨 성에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두 가지 해석이 있다)을 했다. 사실 이 대목은 설이 굉장히 다양하게 갈리는 부분인데 주로 '임나가라', '종발성', '안라인수병' 3곳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 임나가라(任那加羅)의 경우에는 이것을 '임나라는 가라'로 보아서 김해의 임나가라로 보기도 하고, '임나의 가라'로 보아서 김해의 가라국으로 보기도 하며, '임나와 가라'로 보아서 창원의 임나와 김해의 가라로 보기도 한다. 한편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는 임나가라를 김해가 아닌 [[고령군]]의 [[대가야]]로 보는 견해를 내기도 했다.[* 가야(가라)라는 명칭이 가리키는 대상은 가야권에서 주도권을 잡은 소위 '맹주'국이 누구냐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경우는 대가야가 주도권을 차지하기 시작한 시기를 통설보다 좀 더 올려잡은 4세기 중ㆍ후반으로 보는 시각이다.] * 종발성(從拔城)의 경우에는 종발(從拔)을 동사로 봐서 '따라서 성을 무너뜨렸다'로 보기도 하고, 이 자체를 하나의 명사로 보아서 '종발성'이라 보고 이를 [[부산]]이나 [[김해]]에 비정하기도 한다. *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의 경우에는 안라(安羅)를 명사로 봐서 '[[안라국]]([[함안]]) 사람 수비병'으로 보기도 하고, 이는 가야권 서쪽에 있는 안라국의 위치상 좀 뜬금없는 구절이라 안(安)을 동사로 봐서 '나인(羅人) 수비병을 안정시켰다'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나인'이 누구냐는 문제가 겹쳐서 신라인이라는 설, 가라인이라는 설, 안라인이라는 설, 그냥 나인(邏人)이라는 설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2-12.jpg|width=100%]]}}}|| || {{{#000000 백제-가야-왜의 연결 }}} || 그러나 확실한 점은 이를 계기로 고구려가 한동안[* 약 20~30년 정도로 추정한다.] 신라에게 내정 간섭 수준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며,[* 심지어 '''내물왕이 직접 와서''' 조공을 바쳤을 정도라 하니 말 다한 셈.] 또한 앞서 [[근초고왕]] 시기 이룩했던 백제·가야·왜의 국제 커넥션이 사실상 와해되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김해의 [[가야#s-5.1|가락국]]은 기존까지 담당해오던 국제 사회의 중간 매개자 역할이 축소되면서 가야 내부의 주도권도 점차 상실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른바 '''전기 가야 연맹의 와해'''로 지칭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이 갈리지만[* 학계에 따라 김해 금관가야의 패권은 광개토왕 남정 이전에 끝났다, 이 남정으로 타격을 받았다(통설), 남정 이후로도 한동안 금관가야의 주도력이 유지됐다는 설이 있다.] 그 뒤로도 김해 가락국은 일단 존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929170|드러났다.]] 고구려가 가야 지방에 유형지를 두었다는 기록과 가야의 정치에 고구려가 개입한 적이 있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명확한 출처가 필요하다. 할아버지 [[고국원왕]], 큰아버지 [[소수림왕]], 아버지 [[고국양왕]]의 한을 어느 정도 푼 셈이다. 이후 영락 14년(404)에 백제, 가야, 왜가 다시 대방계(帶方界)로 침입해 들어오긴 하지만[* 대방계는 앞서 대방군이 있던 황해도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위에 제시된 지도상으로 보면 백제가 가야와 왜를 다시 끌어들인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위와 같은 선례도 있거니와 그렇지 않고서는 멀리 황해도까지 연합군이 공격해 올 이유도 보급선도 없다는 주장이다.] 이내 평양에서 출정한 광개토대왕에게 4년 전처럼 또 궤멸당한다. 물론 영락 17년 기사에서 '사방합전'으로 '참살탕진'된 적국이 백제라고 본다면 이것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백제 쪽에서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이즈음 백제가 고구려에게 넘어가버린 한북 일대와 개성 청목령까진 수복하는데 성공했을 확률이 높다. 이후 개로왕 때까지도 개성은 백제가 점유하고 있었는데 그 동안 딱히 백제가 대고구려전에서 성공적이지 못했고, 광개토대왕비에서 가야와 왜를 끼고 들어온 백제의 이 배신 행태가 상당히 짜증스러운 어조로 기록된 걸로 봐선 성과가 아주 없었던 아니었다. 그나마 개로왕때까지 버틴 건 개성까지라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백제는 광개토대왕 14년에 [[전지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내분을 겪기도 하거니와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친위 세력으로 해씨와 목씨가 주도권을 잡다가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여 태후의 섭정을 받고 [[비유왕]]은 모종의 이유로 들판에 가매장당하는 등 이리저리 치이면서 신라, 남조, 왜와의 외교에나 전념하게 되는데, 아신왕이 비굴하게 항복하는 시점의 영토를 고구려가 계속 쥐고 있었으면 백제의 이런 꼼수는 불가능했다.[* 백제 입장에선 국가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쳐도, 그 때까지 백제가 해온 짓들을 보면 광개토대왕 입장에선 꽤 봐 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걸 왜를 끌어들여 약속을 어기고 뒤통수를 쳐댄다가 또 황해도를 넘보니 광개토대왕이 크게 화날 법도 했다. 훗날 이것을 수습하고 백제를 중흥한 게 아신왕이 죽고 나서 반세기쯤 뒤에 즉위한 개로왕이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수왕의 공격 당시 한성 공격 때 이 빚을 이자까지 쳐서 톡톡히 돌려받게 된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392년에 남으로 백제 침공, 북으로 거란 침공. 395년까지 남으로 백제 방어, 북으로 비려 침공. 396년에 대대적인 백제 강습. 397년까지 요동에서 후연 세력 구축. 398년에 잠시 북으로 숙신을 치고, 400년에 요동에서 후연 공격 방어. 401년까지 신라에서 백제·가야·왜를 몰아내고 가야까지 진출했다. 군대를 동원하기 힘든 계절을 제외하면 거의 쉬지 않고 정복만 했고, 그야말로 전방위적 전선의 공격-방어 교차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 사건이 고등학교 한국사,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 사료로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도 민심이 동요하지 않고, 가는 족족 이겨먹었다.''' 사실 고대나 중세 국가들 중엔 이런 식으로 연속적인 군사 활동이 이어지는데도 나라가 부강하고 민심이 안정적인 사례가 의외로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아틸라]] 시절의 훈이나 [[카롤루스 대제]] 시절 프랑크다. 이는 강대한 군대를 그 국가가 장기간 보유하기 힘들 경우 나타나는 현상으로, 잇단 승리와 전리품을 통해 군대를 유지하고 그 승리가 계속되는 동안 국가가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건 상당히 외줄타기에 가까운 국가 운용 방식이며 적정선을 지키지 않으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 각설하고 이렇게 한반도와 만주의 이런저런 세력들을 손봐주는 과정에서 서서히 요동의 패자 자리를 놓고 고구려의 큰 원수이자 숙적인 [[후연]]과의 전쟁이 시작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