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생애 (문단 편집) === [[후연]]과의 8년 전쟁과 [[후연]]의 멸망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log.gorekun.com/2673956084.jpg|width=100%]]}}}|| || {{{#000000 [[랴오허|요하]]를 건너 후연의 숙군성으로 진격하는 광개토대왕 민족기록화[* 뛰어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1970년대에 그려진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고증을 보여준다. [[서울대학교|서울대]] 미대 이종상 교수의 작품으로 자세한 정보는[[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57335000&qb=6rSR6rCc7Yag64yA7JmVIOuvvOyhseq4sOuhne2ZlCDshJzsmrjrjI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AszA35Y7uRssvdB7Gossc--048979&sid=TiAzRP8DIE4AAH1sEgE=|링크]] 참조.] }}} || 상술한 바와 같이 400년, 후연의 중종 소무제 [[모용성]]은 고구려가 신라로 지원군을 파견해서 백제·가야·왜와 대치하는 와중에 조공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신이 무례하다는 핑계로 쳐들어왔다. 후연군은 [[모용희]](훗날의 소문제)를 선봉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무너뜨리고 700리에 달하는 땅을 집어 삼켰으니, 사실상 요동의 방어선에 구멍이 난 셈이었다. 신라로 대다수의 병력이 집중된 상황이라 북방으로 방어군을 파견할 수 없었던 고구려는 무력하게 땅을 내줄 수 밖에 없었으나, 다행히 직후 양평령 단등의 반란으로 후연의 요동 진출이 주춤하면서 한숨 돌린 고구려군은 남쪽 신라로 내려와 세 나라의 연합군을 몰아내고, 이내 다시 북쪽으로 돌아와 조상들의 원수를 갚을 대반격을 준비한다. 401년, 반란을 진압하던 와중 모용성이 붕어하고, [[모용희]]가 즉위하는 등 후연에 내홍이 계속되는 틈을 타서 광개토대왕은 다시 신성과 남소성을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02년 5월에 광개토대왕은 증조할아버지 미천왕과 할아버지 고국원왕, 큰아버지 소수림왕, 아버지 고국양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사를 보내 후연 평주의 숙군성을 기습 공격했다. 이에 숙군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면서 평주가 고구려에 함락된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인 404년, 대방계를 공격해 온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이 광개토대왕에게 격퇴당한 후인 11월에 모용희는 황후 부씨와 함께 사방으로 쏘다니면서 사냥을 벌이는데, 이 와중에 [[호랑이]]와 [[이리]]에게 죽거나 얼어서 죽은 자가 5,000여 명이나 되었다. 원수를 갚을 좋은 기회라고 여긴 광개토대왕은 그해 12월, 다시 한번 후연을 공격해 연군에서 100여인을 살육·약탈했다. 연군은 본래 [[베이징]]의 계현이 치소지만, 연군은 399년에 태수 고호가 북위에 갖다 바친고로 이 시점에는 대릉하 유역에 이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 역사 문화 연구소의 김용만 소장은 저서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에서 앞선 모용희의 사냥을 고구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출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짐승이나 동사로 5,000여 명이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무엇보다 한참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군이 코앞까지 처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사냥이나 다니고 있다는게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후연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405년에 이르러 [[모용희]]가 군대를 몰아 요동성으로 직접 쳐들어 온다. 모용희는 요동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모용희가 동행한 황후 부씨와 함께 성을 깎아버리고 가장 먼저 입성하겠다며 시간을 끄는 바람에 이를 틈타 고구려군이 방어 태세를 정비하여 결국 요동성을 함락시키는데 실패한다. 그해 12월, 후연의 황제 모용희는 다시 [[거란]]을 정벌하러 용성을 출발해 이듬해 1월 형북에 이르렀다가 생각보다 강했던 거란의 위세에 놀라 퇴각하고 만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행한 황후 부씨가 바가지를 긁는 바람에 치중까지 내버리고 3,000리를 달려서 꿩 대신 닭이라고 고구려의 목저성을 기습했지만 참패하고 만다. 광개토대왕 15년 봄에 고구려에 가뭄이 들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기간에는 고구려의 국내 사정이 안 좋은 관계로 후연에 공세를 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듬해 고구려의 사정은 궁궐을 증축할 정도로 호전되었다고 여겨진다. [[영락 17년 전투|영락 17년에는 광개토대왕이 보•기 50,000명으로 모종의 적과 '사방합전'(四方合戰)하여 모조리 참살했다.]] 노획한 개갑이 10,000여 령이고, 군수 물자가 부지기수로, 돌아오며 깨뜨린 성이 사구성, 누성, 우불성 등이라고 하는데 하필이면 이 부분에서 적이 누군지 알려주는 내용이 판독 불가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적을 후연으로 보는 설과 백제·가야·왜 연합군으로 보는 설로 갈리고 있다. 만약 후연이라면 같은 해에 발생한 후연의 멸망과 큰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같은 해인 광개토대왕 16년 7월에 후연의 한족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막장 황제 [[모용희]]의 목숨을 빼앗고, [[모용운]]을 추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용운은 본래 고구려의 지파로서 과거 환도성 함락 당시 전연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었으며, 후연의 열종 혜민제 [[모용보]]의 양자였는데, 이 때문인지 제위에 오른 뒤 고씨로 성을 갈았다. 후연이 '''[[북연]]'''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모용운 시기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하고, 모용운 시기만 뚝 떼어서 대연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국호는 다 같은 '연'(燕)이다.] 하필이면 고구려 사람인 모용운을 골라 세운 것으로 미루어 [[풍발]]이 고구려와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일단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아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17년 3월, 광개토대왕은 [[북연]]으로 사신을 보내어 '종족을 베풀었다.(叙宗族)' 모용운이 고씨로 성을 회복한 것을 본가인 고구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북연]]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