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생애 (문단 편집) === 거란-비려 원정 === 《위서》 〈거란전〉에 따르면 거란은 388년에 [[북위]]가 동쪽으로 [[고막해]]를 정벌하면서 고막해에서 분리되어 나온 세력이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 '거란'이라는 칭호는 5세기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10년 앞선 378년에 이미 거란이 고구려의 북변을 침탈하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시기의 거란은 아직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되지 못한 초창기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거란 원정 때부터 광개토대왕의 지시로 더욱 발달한 [[개마무사]]들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다.[* 개마무사는 광개토대왕 시기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E11D206-C586-42D2-BB0C-365C530078F2.png|width=100%]]}}}|| || {{{#000000 비려 친정 당시 건넌 것으로 추정되는 시라무렌 강[* 그리고 남쪽 지류인 랴오허(요하)는 이후 당나라와의 세력 다툼에서 고구려의 전방 거점으로 등장한다.] }}} || 영락 5년에 광개토대왕은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는 비려[* 능비문의 판독에 따라 '비려'(碑麗)를 '패려'(稗麗)로 읽기도 한다.]를 토벌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을 격파하니, 600 ~ 700영에 마소와 양떼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 요동을 거쳐 국경을 돌아보고 사냥을 즐기다 왔다. 일설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이 깃발병과 북을 치는 병사들의 수를 늘리고, 기병들의 다리에 나뭇가지를 매달아 간격을 띄워 배치해 먼지 구름이 일어나게 하고, 병사들의 갑옷에 철 조각과 방울 따위를 달아 요란한 소리가 나게 하여 대군을 이끌고 온 줄로 착각한 비려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의 비려 또는 패려에 대해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거란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요동과 인접해 있는 점에서 위치가 들어맞고, 사람을 돌려받으러 갔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서술과 일치한다. 구체적으로는 거란의 '필혈부'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외에도 많은 이설이 있지만, 적어도 [[랴오허|요하]] 중, 상류 지역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즉 광개토대왕 원년부터 시작된 거란 정벌이 이 시점에 와서 마무리되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복수의 전선을 함께 운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광개토대왕릉비〉는 《삼국사기》와 달리 광개토대왕의 정복 과정을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정복이 마무리되면 당시까지의 경과를 몰아서 정리하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영'''은 유목민 마을의 단위라고 한다. 보통 100개의 게르가 모여 1영을 이룬다고 하는데[* [[김용만]],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이에 따르면 비려의 인구는 700영 × 100게르 × 5인[* 한 게르는 한 집으로 곧 한 가족이고, 한 가족의 구성원을 5인으로 본 기준.]으로 자그마치 35만명에 달한다. 하지만 유목민 마을이라는 것이 애초에 100개 단위로 정확히 끊어서 통제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위서》에 따르면 당시 거란은 대다수가 북위군의 침공을 피해 달아나 흩어진 상태였으며, 또한 영(營)과 부(部)가 서로 병렬적인 관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요동을 거쳐 돌아왔다는 서술을 자세히 보면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역성(力城)과 북풍(北豊)에 왔다고 되어 있는데, 양평은 요동군의 치소로 흔히 요동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고, 북풍과 역성은 모두 요동군에 소속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고국양왕 때까지만 해도 [[요동]]은 후연의 땅이어서, 거란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요동 일대를 확보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후연의 양평령 단등의 묵인하에 요동 땅을 맘대로 지났거나, 이미 그 이전에 양평을 제외한 요동 일부, 즉 역성과 북풍을 미리 확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성과 북풍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설이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특히 북풍의 위치에 대해 혹자는 요양 북쪽이라거나 심양 서쪽이라 하기도 하고, 막가면 통화 즉 국내성 인근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중국역사지도집》에는 요동반도 한가운데로 표시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의 이 부분에서 '비려'라는 판독을 따를 경우, 碑麗라고 쓰는데, 여기서 앞글자는 '비석'이라는 뜻이고, 뒷글자는 '매다'라는 뜻이 되어 비석에 매달아놓은 제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백제를 '백잔'[* 여기서 '잔'은 '殘'(남을 잔) 자로, 먹고 남은 밥을 의미하는 '[[잔반]]'(殘飯)의 '잔' 자와 같다. 즉 '백제 잔챙이들'이라는 멸칭이다.]으로, 왜를 '왜구' 등으로 멸칭한 것과 같은 거란 필혈부에 대한 멸칭이 되는 것이다. 물론 한자의 뜻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는 단순 [[음차]] 표기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 비려(패려?)의 정체는? * 부산적: [[신대왕]] 5년 (기원 후 169년)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 《삼국사기》 // 이 기록의 부산적이 비문에 나타난 부산이라는 지명과 통하는 점에 착안하여 부산적이 비려와 모종의 연관이 있는 세력이 아닌가 하기도 한다. 부산은 [[랴오허|요하]] 서쪽 법고현 서북쪽 일대라고 한다. * 《진서》에 나오는 비리: 당나라 시기에 편찬한 동진의 역사를 다룬 《진서》에 비리라는 세력이 나온다. 숙신의 서북쪽으로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나온다고 한다. 너무 멀다... 물론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 것은 맞지만, 200일 어쩌고 하는 부분이 잘못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기록 자체는 바로 밑 《위서》의 것보다 좀 늦지만 시기는 아래 《위서》의 기록이 5세기이나 이것은 4세기로 좀 빠른 편이다. * 북위측 기록의 필혈부: 《위서》 〈거란열전〉에 나오는 필혈부와 같은 세력이라는 설이다. 《위서》의 편찬 시기가 6세기 북제 시기임을 고려하면 그럴싸하다. * 거란 측 기록의 비리: 저 멀리 거란의 역사를 다룬 《요사》의 〈지리지〉에 비리군(陴離郡)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거란에서 집주 회중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한나라 때 험독현, 고구려 때 상암현에 속했다고 한다. 이 비리군이 비려족의 위치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요사》 〈지리지〉의 신뢰도와 500여년을 훌쩍 뒤어넘는 어마어마한 시간적 격차를 생각해보자. * 또다른 고구려라는 설: 거란계의 부족이라는 일반적인 논지와 달리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설. 고구려의 끝 글자인 麗자가 비려의 끝 글자이기도 한 점에 주목하여 비려라는 뜻을 고구려에 반발적인 고구려계의 부족에 대한 멸칭으로 보고, 고구려의 선조인 대수맥과 대립한 소수맥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소수맥은 이미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에 흡수되어 안드로메다로 사라지고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