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평가 (문단 편집) == 삼국 통일과 중원 정복?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태왕북~1.jpg|width=100%]]}}}|| || {{{-1 [[형민우]] 《[[태왕북벌기]]》 中}}} || 많은 한국인들이 고대 신라의 [[삼한일통]]에서 만주를 상실한 기억과 근대 일제 식민지 시절의 아픈 기억 때문인지 '''"[[광개토대왕]]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삼국통일|삼국을 통일]]하거나 중국을 정복했을까?"'''하고 상상을 하곤 한다. 발해가 고구려의 뒤를 이어 만주 부근의 영토를 유지하긴 했지만, 삼국끼리 치고 박고 싸우던 고구려 시절과 달리 발해는 신라와 그렇게 투닥거리지도 않아 현 한국사와의 연결성이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고, 그나마도 거란에게 멸망하며 고려에 발해 유민들이 흡수된 뒤에 [[한민족]]은 만주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기에 광개토대왕에 대한 아쉬움은 더 커지고는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전성기 [[장수왕]]-[[문자명왕]] 대에도 결국 그렇게 못했던 것을 보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장수왕 시기와 광개토대왕 시기는 좀 다르긴 하다. 장수왕때는 한창 북위가 세를 떨치던 시절이라 화북이 사실상 북위의 손에 들어가 있어서 고구려가 어찌 해 볼 상대가 아니었고, 광개토대왕때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한반도가 그리 쉽게 다 먹을 수 있는 땅이 아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4군 6진]]을 개척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한반도'라고 하면 대부분이 그 경계로 생각하는 압록강-두만강 이남 지역 전체를 완전히 장악한 적이 없다.[*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살고있는 현 시대에도 냉정히 이야기 하면 [[남북분단]]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국가는 없다.] 장수왕도 백제와 신라 [[나제동맹]] 연합을 100년 가까이 수없이 공격해 한강 유역까지는 차지했지만 결국 완전 정복은 [[자비 마립간]] 등의 우주 방어에 번번히 막혔다. 외세세력으로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켜 [[한사군]]을 설치하기는 했지만 한4군 가운데서 [[임둔군]]은 오래지나지 않아 [[동예]]와 [[옥저]]로 떨어져 나갔기에 완전한 지배라고 볼 수 없었고, 그나마도 한반도 남반부는 수십여개에 달하는 국가들이 난립해있었다. [[당나라]]도 한반도를 먹으려고 했지만 [[나당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나마 정복했다 볼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 제대로 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20여년만에 [[발해]]로 재독립하였으며, [[몽골 제국]]도 마찬가지로 고려를 부마국으로 복속시키기는 했지만 [[여몽전쟁]]이 오랜기간 동안 지리하게 이어진데다가 무신정권이 끝날 때까지 수십년이 걸리는 매우 지리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온전히 영향권 안에 편입시킬 수 있었으며 이마저도 중앙집권제가 퇴보하고 봉건제가 부활한 [[원나라]]의 상황 탓에 고려가 사실상의 독립국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후금 시절 [[사르후 전투]]와 [[정묘호란]]에서 승리하고, 국호 변경 이후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조차 조선을 조공국으로 삼는 정도에 그쳤고, 태종 [[숭덕제]]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진짜 목적이었던 조선 병합만큼은 1912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하는 순간까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일본 제국]]이 1910년에 대한제국을 완전병합하기는 했으나 이 역시도 수십년에 걸쳐 조선의 성장을 방해하는 등의 뒷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온데다가 무엇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운빨이 크게 작용했다. 만약 두 전쟁에서 하나만 패배했더라도 일본 제국은 조선을 먹을 수 없었다. 그마저도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망으로 인해 한반도의 독립이 이루어지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한반도, 특히 백제와 신라가 기반한 삼남 지역은 농업 생산력이 받쳐줘 인구 밀도가 매우 높은데 이 삼남 지역은 [[고려시대]]~[[조선시대]] 내내 국가에게 가장 중요한 농경지대였다. [[중국|인구로는 실로 어마어마한 나라]]가 바로 옆에 있어서 부각이 잘 안되기는 하지만, 한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인구로는 세계적으로도 상위권이다.[* [[대한민국]]의 인구밀도 순위는 세계 13위이지만, 인구 1000만을 넘는 국가들 중에서는 3위이다.] 조선 시대 인구는 세계적인 기준으로도 상위권이었고[* 일본과 비교할 경우 신라~고려시대까지는 엇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면적과 기후 여건이 훨씬 유리한 일본이 한반도를 역전하는건 기정사실화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이미 밀린 것으로 보며, 특히 일본 센코쿠시대가 끝나고, 에도시대에 들어서며 수 배의 차이로 벌어졌다.] 앞으로 통일이 되면 성립될 통일 한국의 인구[* 7000만이 넘는다.]도 세계적인 기준으로 많은 편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국력의 기반은 경제력이고 경제력은 결국 인구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이처럼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을 곧바로 정복하는 것은 아무리 확장 일로에 있는 전성기의 고구려라 해도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한반도는 산악 지형 역시 많기에, 제각각의 세력들이 외적을 방어하기 쉬워 하나의 통합된 정권이 나오기 어려웠었다. 실제로 한반도 내에서 삼국은 서로가 주도권을 쥔 적은 있어도 어느 한쪽이 쉽사리 통일은 하지 못했다. 기껏 한 통일마저도 통일이라고 하기 힘든 결과물이었다. 특히 소백산맥이라는 자연방어선을 사용하는 영남 일대의 신라는 국력 대비 공략하기 매우 까다로웠다. 상황이 이런지라 광개토대왕이라 한들 삼국을 완전하게 통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만약에 삼국이 온전한 의미의 통일을 이루었으면 막대한 인구수와 생산력을 갖춘 막강한 강대국이 탄생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사실 고구려의 삼국통일을 거론하는 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을 오해한 결과이다. 고구려의 세계관 및 천하 질서는 자기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나라와는 대등하게 [[https://naver.me/5s39ngxf|교린]]하고 자기보다 하수인 나라들에게는 상국 대접을 받는 것이었다. 즉, 애당초 고구려라는 나라가 정복을 중시하는 [[제국]]을 지향한 나라가 아니었다. 위에서 알아본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 역시 모두 이러한 고구려의 세계관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단, 정말 광개토대왕 대에 삼국(+가야)을 통합할 역량이 있었어도 천하관 때문에 남부 국가들의 자치성을 허용했을지는 미지수이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후방의 잠재적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게 전략상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요한 점은 정복과 통치는 별개라는 것이다. 실제 역사상에서도 방대한 영토들을 제대로 통치를 못해 순식간에 와해된 국가는 한두 개가 아니다. 예를 들어 [[몽골 제국]]이나 [[마케도니아 왕국]], [[소련|소비에트 연방]], [[독일 제3제국]], [[그란 콜롬비아]] 등이 있다. 지금이야 [[한민족]]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 [[백제]]는 말 그대로 남남으로 보는 성격이 강했다. 전자는 북방계 [[예맥]], 후자는 남방계 한의 후예였으므로. 물론 그 전에 북방계 [[고조선]]과 남방계 [[진국(국가)|진(辰)]]의 교류가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의 동질 의식 역시 있었다 할 수 있겠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한민족이라는 의식이 형성된 건 빨라야 6세기 이후의 삼국시대 말기다. 이때부터 소위 '삼한'이라 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묶어서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동질성과 타자로서의 인식이 복합적으로 존재했다. 이런 이질성을 극복하고 정복 이후 통치까지 순조롭게 진행했을 가능성은 낮다. 한편 6세기 이후 더욱 완전한 동질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북방 민족으로부터의 많은 외침을 받는 과정에서 일정한 민족 의식이 생긴 이후인 고려시대 말기부터였다. 당장 [[후삼국시대]]에 각 지역의 호족들이 삼국 부흥이라는 기치를 얼마나 쉽게 내걸었고, 또 거기에 지역민들이 얼마나 쉽게 호응했나를 생각해 보자. <[[http://ko.wikipedia.org/wiki/%EA%B1%B0%ED%83%80%EC%A7%80_%EC%84%A4%ED%99%94|거타지 설화]]> 같은 내용을 보면 심지어 9세기 중반에도 '백제' 해적이라고 가리킬 만한 대상이 등장한다. 경남에서는 가야의 부흥이라는 명분도 호응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초중기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부흥운동]]이 수 차례 있었다. 비록 고려 조정에게 토벌당해 실패했지만 그 구호가 삼국통일 이후 수백년이 지난 고려 중후기까지도 백성들에게 먹혔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 생전에는 한반도 남부인들은 잡아다가 [[묘지기]]로 부려먹는 존재에 불과했다. 사실상 정복보다는 그냥 두들겨 패고 말 고분고분히 듣게 만드는 게 이익이었다. 그래서 백제와 신라, 가야를 신하로 부리고, 점진적으로 잡아먹는 그랜드 플랜을 세워 둔 모양이었으나 백제 [[개로왕]]의 반발과 신라의 이탈로 실패한다. 다만 이때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한 덕에 신라에 고구려와 서역의 문화가 이식되고, 이는 후세에 한국이 고구려 계승을 주장할 근거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런저런 문제를 떠나서 정복에 드는 군사적 역량만 따진다 하더라도 삼국통일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희박해보인다. 실제 역사에서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50,000명의 대군을 [[가야]]에 파견하자 [[후연]]이 쳐들어오거나 후연과 백제가 서로 눈치를 봐 가며 각자 고구려의 서쪽과 남쪽을 공격하여 고구려가 특정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방해하는 효과를 거둔다. 애초에 한 나라가 동서남북 여러 전선을 유지하는 건, 그 나라가 설령 대제국이라도 매우 힘들다. 그 거대한 [[당나라]]마저도 티베트와 신라를 저울질하느라 고생했던 점을 기억하자. 즉위 17년 후연이 사실상 멸망하고, 고구려의 종족 내지는 하국으로 전락하면서 광개토대왕은 그가 죽기까지 5년간 성을 쌓고 지방을 순행하는 등 굳히기에 힘썼고, 이는 광개토대왕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장수왕 대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이는 재위 초의 격렬한 정복활동과 상당 부분 대비되는 것이다. 이를 보면 광개토대왕은 딱히 정복 전쟁 계획을 더 추진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새로운 정복 활동을 준비하다가 사망했을 공산도 있다. 실제로 [[장수왕]]이 한강 유역을 먹고 신라까지 마무리하러 내려왔던 것을 볼 때 고구려 내에서도 "저거 저거 뒤통수가 간지러운데 언제고 정리해야 되겠다"라는 인식이 생겼을 개연성은 높다. 장수왕 대에 막히긴 했지만. 광개토대왕의 이른 죽음과 막강한 전투력 및 전기를 판단하는 능력을 고려해 볼 때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하는 생각은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백제의 국력 회복이나 신라의 성장, 그리고 광개토대왕 못지 않았던 장수왕의 역량을 고려해보면 가능성은 그렇게 높진 않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5~6세기 고구려, 백제 사이의 한강 유역 영유 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 중심적인 if 시나리오에 지나치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편 중국 방면의 정복 활동은 요서, 아무리 영향권을 뻗쳐도 현 [[베이징]]까지가 끝인 것이 확실하다. 후연 정벌에서 요서까지만 진출하고 더 이상 중국 방면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못한 것도 되고 안한 것도 된다. 당시 중원의 상황은 막장의 끝으로 치달아가고 있는 [[오호십육국시대]]인지라, 도저히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당시 중원은 명나라 말기처럼 내분으로 무주공산이 되어 무혈입성할 수 있던 게 아니라 난폭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날고 기는 유목민 북방 민족들이 서로 잡아먹으려고 [[부족전쟁]]을 치루는 [[혼돈의 카오스]] 시기였기에 광개토대왕이라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기회가 아주 없던 건 아니고 [[북위]]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가 기회이긴 했으나 이때 고구려는 이미 광개토대왕 사후 1세기 이후의 일이었으며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에 밀려서 한반도조차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중원에서 날고 기던 5호 군웅들이 전진이나 북위 때에 와서야 외부 침략자인 그들이 중원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까지 자그마치 1세기가 소요되었다. 그 사이 무수한 세력과 나라가 명멸해 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의 중원 진출은 단순히 땅따먹기 정복에서 국한될 사항이 아닌 것이다. 또 고구려식 천하관에서 난하 서쪽의 [[만리장성]]을 넘는다는 건 무의미했다. 고구려 스스로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언급 등을 보면 결과적으로 고조선의 고토 이상의 땅을 취하는, 무리한 확장 자체를 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고구려의 통치 방식은, 아직 기록적인 부분이 미흡하여 논란이지만, 토착민 자치를 허용하면서 군사를 주둔시키고, 어느 정도의 동화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었는데, 고구려와 이질적인 중원 문명권에서는 이런 통치 방식이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동화 정책, 간접 지배화, 그리고 간접 지배화 지역의 직접 지배화가 먹혔던 건 고구려의 주요 정복 지역이 고조선, 부여, 백제, 신라처럼 고구려와 어느 정도 문명이 동질적이었던 데 이유가 있다.[* 여기서 신라를 단순 남방계로 보면 안 된다. 신라의 전신인 진한이 오히려 마한, 변한에 비해 고조선계 주민 비율이 대단히 높아 고고학적으로는 거의 전체가 그냥 조선계 주민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진국|진]]'(辰)은 남방계가 아니라, 고조선이 전국시대 연나라에게 정신없이 깨져나갈 때, 대거 발생한 조선계 유민 중 아예 한반도 남부까지 멀리 가는 걸 선택한 이들이 주류다. 고구려 또한 정작 부여계 주민인 지배층은 건국 초에는 소수였고, 그 대부분은 전국시대 연나라에게 밀리기 전 고조선을 구성했던 요동 동부 주민이었으니 신라와는 고조선이라는 강력한 연계가 있다.] 하지만 난하 서쪽은 전혀 다른 문명권이기에, 고구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인구를 기반으로 무력으로 정복은 한다 쳐도 정치적, 문화적인 한계를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중원 정복은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 되는 것이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국력의 한계는 둘째 치고, 역으로 고구려의 문명이 흡수되어서 중국에 동화될 경우의 가치 문제를 판단해 본다면 차라리 안전한 형태의 국경선과 영토 체제를 갖추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북연을 그렇게 존속시켰고, 나중에 요서 지역에 대해서도 난하와 조양 서쪽으로는 영토 확장의 의도를 보이지 않았던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조차 라인강 이북으로 넘어가려고 하지 않고, 안정적인 국경선을 구축하는 정치적 판단을 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 안정화와 문명 안정화를 꾀했던 바 있다. 게다가 고구려는 오랜 시간 이민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공략했다가도 결국 중원 문명에 흡수 및 동화되는 사례를 몇 백년 내내 지켜본 나라이기도 하다. 중국이 막장 시기이긴 하나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는 문제로 생각하면 오히려 별개 천하로 차치하여 경계를 제대로 긋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게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가 [[북연]]을 완충 지대로 기능하게끔 조치했던 점이 이를 증명한다. 수천년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화북]], 혹은 그 너머 중원까지 장악한 [[북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중 현대까지 이어져 살아남은 나라는 [[몽골]][* 그 몽골조차도 현대에나 중국에서 독립할 수 있었을뿐더러 그마저도 [[외몽골]]의 할하 몽골족 한정이었다. [[내몽골 자치구|내몽골]]의 차하르 몽골족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의 [[오이라트]] 몽골족은 끝내 중국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시베리아]]의 [[부랴트인|부랴트 몽골족]]과 유럽의 [[칼미크인]]은 러시아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하나밖에 없다. 설령 고구려가 무력으로 화북이랑 중원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도리어 고구려인(+삼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거나 행여나 [[한족]]에 동화되기라도 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고구려라는 이름을 그리 중요하게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거나 심지어는 중국 일부의 주장대로 '''고구려 역사는 [[중국사|중국의 역사]]로, [[한민족]]은 [[중국/민족|중국 변방의 한]] [[소수민족]]으로 전락했을 수도 있다.''' 가장 최근에 그런 식으로 몰락한 북방민족이 바로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었던 [[만주족]]이다. 물론 만주족이란 민족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지금의 중국도 한족보단 [[한족]]과 여러 소수민족이 포함된 [[중화민족]]이란 개념을 내세우긴 하지만, 현실은 한족 중심이란 건 부인할 수가 없다.[* 다만 좀 과장 섞인 주장인 것은 알아두어야 한다. 중원을 차지했던 이민족 모두 평소엔 부족 단위의 세력들이었던데 반해 고구려는 이미 확고한 국가 체계를 갖추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구려를 포함, 삼국 모두 정주민족국가였다. 세력이 약하던 시절엔 부족단위로 쪼개져있던 유목 민족들과 그대로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리고 그 유목민족 조차도 원래의 지배계층과 발원지역의 거주민들은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했다. 지금의 중국같은 민족구성과 정체성은 청나라 이후 공산주의 중국이 성립되면서 생긴 것이다. 그마저도 공산당의 역사왜곡을 동반한 지속적인 노력끝에 이루어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