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릉비 (문단 편집) ==== 백제를 격파한 주체에 관한 논의 ==== 한국학계가 백제를 격파한 주체가 고구려라고 보는 반면, 일본 학계는 당시에 실제로 왜가 강성하여 백제, 신라 등을 깨뜨릴 만 했다고 주장한다. 대개 광주광역시에 있는 장고분[* 최근에는 장고분이 한반도에서 먼저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나와 잘 쓰이지 않는다.]이나 [[백강 전투]]에 동원된 일본 수군의 존재 등이 근거로 제시되며, [[송서]], [[수서]]의 기록 및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조공 기사・볼모 기사 등이 쓰이곤 한다. 칠지도도 백제가 왜국에 '조공'한 공물로 해석한다. 신라가 볼모를 보낸 것은 미사흔 한 명이 확인된다. 신라가 [[미사흔]]을 일본에 보낸 것을 살펴보면, [[실성 마립간|당시 신라 임금]] 입장에서 미사흔은 [[숙청]]하는 것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여기서 일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삼국유사의 391년 기록인데, 여기에선 삼국사기의 논조와 달리 "미사흔이 391년에 왜국에 인질로 잡혔다"고 서술되었다. 즉, 신묘년의 신민의 기사가 이를 두고 지칭한 것이라면 일본 측 해석이 맞다. 또 신묘년 ‘도해파 백잔’의 해석을 두고선 일본서기의 392년 (이주갑인상을 고려해 120년을 더한 년도) “진사왕이 무례하게 굴어서 (왜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그를 꾸짖자, 백제인들이 왕을 죽여 사죄했다”는 기사를 두고, 이것을 지칭한게 아니냐는 해석 또한 있다. 물론 액면 그대로는 말도 안되는 윤색이지만, 어느 정도 사실을 투영하고 있는 기사라면, 재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신왕이 친왜계 세력들의 지지를 얻어, 왕위를 찬탈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추측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한다고 해도 릉비의 ‘도해파’는 말 그대로 두 세력 간의 물리적 ‘충돌’을 함의하는 것이므로, 고구려가 정말로 백제에서 일어난 왕위 찬탈을 군사적 충돌로 인지했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신빙성을 따져봐야 한다. 실제로 일본서기에 의하면 원래 아신왕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가 진사왕이 찬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나중에 아신왕이 숙부인 진사왕의 왕위를 재찬탈 했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는 [[아신왕]] 때 태자 [[전지왕|전지]]를 왜에 인질로 보낸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인물이 왜에 갔으나, 그 성격이 실제 인질이 아니고 '''일종의 [[외교관]] 같은 역할'''을 했을 거라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 전근대 시대에 이런 경향은 매우 흔했다. 유럽에도 이런 식으로 [[인질]] 겸 [[외교관]]으로 간 사람들은 매우 흔했다. [[로마 제국]] 시기에 로마에 칭신하던 여러 게르만 부족들이 귀족의 자제들을 인질 겸 유학생으로 파견하여 로마식 교육을 받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란 게르만 귀족들은 자라서 대(對) 로마 외교의 선봉장이 되어 부족에 크게 기여했다. [[동고트 왕국]]의 성군 [[테오도리크 대왕]]도 이런 경우이다. 따라서 전근대 시대에 보내어지는 인질들은 전쟁 포로와 같은 진짜배기 인질들과는 달리, 그 나라 정부나 왕실로부터 우대를 받았고, 가끔씩 볼모의 모국과의 외교를 위한 창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런 제도가 오늘날에는 다른 나라에 [[외교공관]]을 설치하고 [[외교관]]을 상주시키는 제도로 발전한 것이다.][* 또한 인질을 보낸 나라가 인질을 받은 나라보다 힘이 약하다고 해석하기도 어려운 것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진나라]]의 왕족이자 나중에 [[시황제|진시황]]의 아버지가 되는 [[자초]]는 이웃나라인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졌지만, 그렇다고 이 내용을 가지고서 진나라가 조나라의 속국이었다거나 혹은 조나라가 진나라보다 더 강대국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은 없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진나라는 조나라와 초나라 같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강력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자의적인 해석이며 특수한 경우이므로 모든 인질이 외교관적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해석하기 어렵다. 선술된 자초의 경우에도 차기 권력 다툼에서 멀어져 정치적 숙청이 되는 경우였으며, 인질의 ‘질(質)’의 뜻은 담보, 저당이라는 뜻이다. 즉 아쉬운 쪽에서 먼저 내미는 카드이지, 진나라의 특수한 경우를 빗대어 양극단의 해석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선술 되었지만, 거의 동시대에 신라가 [[실성 마립간]]과 [[김복호]]를 보낸 경우도 신라측에서 아쉬우니깐 외교적 카드로 먼저 내민 것이다. 다만 일본측 주장대로 왜가 강대해서 백제 신라가 인질을 내민 것이며 , 도해파의 근거가 된다는 극단적인 주장과 한국측 주장대로 단지 외교관일 뿐이라는 해석은 모두 통용되기 어렵다는 것을 주지 시키려고 사례를 들은 것 뿐이다. 백제의 동성왕 같은 경우를 빗대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기에 인질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質은 말그대로 저당이다. 저당잡은 물건은 언제든지 돌려줘야 할수 있기 때문에 손상이 가지 않게 각별히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하다. 멀리 가지 않아도 박제상과 미사흔의 일화만 봐도 [[자초]]의 경우를 빗대어 인질을 무조건 외교적인 성격을 띈 특사나 외교관으로만 보는 것도 무리이다.]. 특히 전지왕이 왜로 간 시점에 정작 '백제'와 '왜'라는 두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는 [[백제삼서]]의 기록과 "내조하였다."는 일본 쪽 기록만 있을 뿐, 인질을 보냈다는 언급이 없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도 '인질'이라는 표현은 없고 한참 후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나올 뿐이다.[* 일본서기에 백제의 왕세자나 왕자 중에 인질이라고 서술된 사람은 부여풍뿐이다.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서 부여풍은 인질로 나온다.] 또한 일본어에서 인질에 해당하는 질의 훈독은 무카하리(人力)라고 읽는데, 그 뜻은 왕의 대리인이라는 뜻이므로 일본에서 당대 받아들여지는 인질의 개념은 인신공납의 개념이 아님을 알수 있다. 백제와 왜의 관계도 왜가 백제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일본 극우식 망상이나 거꾸로 백제가 왜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식의 극단적 망상과는 달리, 군사·문화적 혈맹 관계로 보는 게 오늘날 학계의 정설이다. 어느 한쪽의 국력이 약해지고 강해지고에 따라서 서로의 발언권이 세지고 약해지고가 있었을 뿐이다. 일본 학계만 하더라도 예전처럼 [[임나일본부설|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식의 학설]]을 밀어붙이기보다는 한반도 남부에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는 정도로 가는 추세이다.[* 임나일본부설의 현 주소는 백제의 [[요서경략설]]과 비슷한 면이 있다. 요서경략설은 사실 뒷받침하는 사서도 의외로 꽤 있고 학계에서도 꽤 진지하게 연구한다. 하지만 사료의 비교검증 등에 의해 점점 힘을 잃었고, 한국 학계의 정설은 '잘해봐야 백제인 집단 거주지 정도'로 굳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적지않은 한국인들이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음을 사실이라고 믿고, 심지어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도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소개되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식인 것이다.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설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뒷받침하는 사서는 있는데 교차검증상 근거가 희박하고 일본 학계에서도 인정 안 하는 분위기인데, 학계가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고 대중들 중에서도 믿는 사람이 아직 많은 것이다.] 한편 중국 사서 쪽의 기사들, 특히 송서 왜 5왕 기사 등은 대체로 왜국에서 나온 일방적 주장인 경우가 많아 다른 사료와의 [[교차검증]]이 더욱 필요하다. [[수서]]만 해도 신라를 고구려 패잔병이 세웠다드니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는니 하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즉, 수서나 기타 다른 중국 사료들에 나오는 기록들을 전부 다 사실로서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수서 왜국전과 송서 왜국전에 분명 일본 측에 유리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송서에는 433년부터 왜국의 [[왜5왕]]이라는 자들이 중국을 상대로 교류할 때 '왜·백제·임나·가라·신라·진한·모한을 지배하는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을 자칭하였다고 나온다.[* 원래는 '사지절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는데 모두 거부당하고 안동장군을 하사 받는다. 후에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가야 육국제군사를 하사받았다. 또 그 후에 왜왕 興이 이번에 또 '백제'를 끼어넣어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가야 칠국제군사'를 자칭하자 이번에도 중국에선 백제를 누락하고 육국제군사로 임명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아니면 착각인지 허세인지는 백제나 신라에 그러한 기록이 없으니 직접적으로 알 수 없으나, 적어도 5세기 초에 왜국 스스로가 한반도를 속국으로 여겼음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저 관작명은 그냥 '''[[왜국]]의 허세'''다. 위의 관작에서 중국은 백제를 제외하고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의 통치를 인정하는 관작을 내려주었다. 어째서 백제 혼자 빠졌을까? 게다가 처음에 자칭하였고 계속 거부 당하다가 인가받은 작위다. 자칭하는 작위인데도 정작 자신은 백제왕이 하사받은 작위인 진동대장군 보다 낮은 관직을 내려 줄 것을 요청했다. 게다가 일본서기에서 임나의 용례를 살펴보면 일관되게 임나는 [[가야]]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당대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사용하는 임나의 용례와 다르게 와전되어 받아들여진 것이다. 따라서 임나=가야이다. 가야와 임나를 동기시하면 6국이 아니라 5국이 되어야 한다. 일본사 연구자 김현구 교수는 임나는 가야의 구성국 중 하나라고 못박은 바 있다. 임나와 가야를 별개의 나라로 취급하자니, 일본에서 임나와 가야를 당대에 다른 개념으로 구분했다는 용례도 없고, 또 그렇게 되도 임나는 가야의 일부분이니 중복되는 개념이다. 고로 일개 국가인 임나를 연맹체의 통칭인 가야와 동렬에 배치하는 시점에서 논리파탄 이다. 또한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중국 황실은 임나 가라를 포함해 6국 제군사라는 지위를 하사했다. 일본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들며 한반도 남부를 일본 천황이 직할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일본 천황은 중국 황실에 정정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즉, 자신도 허울뿐인 작위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는 중국 남조와 지속적인 교류로 선진 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이고 강력하게 성장한 상황이었다. 이때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수여받은 관작은 왜의 '안동대장군'[* 처음에는 안동대장군이 아닌 안동장군이었다. 안동장군과 안동대장군은 1~2단계 차이가 난다]보다 4단계 높은 '진동대장군'으로[* 고구려는 이보다 두 단계 더 높은 '정동대장군'이라는 직위를 받기도 했다.][* 鎭東將軍 中軍將軍 鎭軍將軍 撫軍將軍 安東將軍 순서다.] 이를 통해 당시 백제의 위상이 왜보다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이 백제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황당한 주장과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왜가 백제를 자신들의 속국(?)이라며 황당한 주장을 중국에 여러 차례 전하자, 이미 백제와 자주 교류하여 백제의 국력을 알았던 중국 남조는 일본이 달라고 자칭한 관작명에서 백제를 아예 제외했다. 한마디로 일본이 요구한 관작명은 그저 허울뿐인 관작이었으며, 따라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비슷한 예가 중국의 책봉 사례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진덕여왕]]은 '신라낙랑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낙랑은 정작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에 있었다. [[백제]]의 [[위덕왕]] 또한 '동청주지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동청주는 중국 [[산둥]]지방이다. 이처럼 남의 영토 이름을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은 당시에 매우 흔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의 관작명을 보면 '진한'과 '모한'이 나온다. 그런데 진한은 당시에 이미 없어지고 신라로 대체되었으며, '모한'은 대개 마한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데 이는 문헌상으로는 온조왕 때, 현실적으로는 적어도 근초고왕 때 백제에 병합되었다.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 나라의 이름'''이 나온 것을 통해서도 이 관작이 허울뿐임을 다시금 알 수 있다. 추가로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에서는 '[[삼한정벌]]', '임나일본부'를 말하고 있지만 대개는 신화적 서술과 '[[이주갑인상]]'을 비롯한 '[[왜곡]]'으로, 철저한 검증 없이 섣불리 믿기는 힘들다. 정리하자면, 왜국 스스로가 당시 사실과는 다르게 백제 등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을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여겼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일본서기》 중 391~396년에 해당하는 기사들에서도 일본이 5만 대군의 고구려군과 싸운 전쟁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일본 학계의 해석에는 기본적으로 크나큰 약점이 있다. 한국 사서들에도 391년에 일본이 한반도를 침공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다시 말해, '왜가 백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신묘년 기사의 일본식 해석이 지니는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주장을 뒷받침할 다른 기록들이 한중일 그 어떤 사서들에서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신묘년조 해석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신묘년조 이후에도 백제가 맹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했기 때문에 왕이 평양성까지 몸소 나갔다는 언급이 나오는 등 백제와 왜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왜도 신라를 공격하거나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기 때문에 기존의 신묘년조 해석이 문맥상 잘 맞다는 것. 이러한 쪽에서는 신묘년조 앞부분에 백제와 신라가 원래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하는 부분에 주목하며 '신민'의 의미가 잘못 해석되었다고 본다. 백제와 신라[* 신라는 후술하겠지만 오래 전부터 속민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누락된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니깐 조공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당장 능비에 나오는 400년의 매금(신라왕)이 직접 알현하여 조공하였다는 기사도 삼국사기에는 없다.]가 원래부터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중국의 고구려 연구학자[* 단순히 개찬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학자라서 일본인들이 호의를 보내는 편이다.]왕건군도 한국의 국내 학회에 참석해, 왜왕이 자칭한 작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요구이며, 백제와 신라, 가야 등을 지배했다고 반복하는 것은 왜가 통치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또 당대에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와 신라, 임나가라만 존재했는데 가야와 임나를 별개의 나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지적했고 이는 자신이 자칭해서 다스리는 나라의 실정도 제대로 모르고 요구한 것이라며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임나일본부설]] 문서에 첨부된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5세기 노중국 교수의 논문 내용이다.] 조선족 연구자 박진석(朴眞奭) 또한 왜왕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조미(祖禰), 즉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통일을 이룩한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한반도까지 진출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도출된 왜구의 성격에 대한 왕건군의 학설은 대체로 이러하다. 한반도 남부를 침탈해 온 세력은 일시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상륙해 인력과 식량을 약취해가는 세력이므로, 한반도 남부를 경영할 만한 능력도 없고 주체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큐슈 북부 일대를 기반으로 둔 '해적'으로 보았다. 간혹 일본인들이 왕건군이 광개토대왕릉비는 개찬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학자이므로, 일본 측 학설을 지지했다는 식의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의 학설은 임나일본부설과 완전히 배치되는 해석이다. 그의 학설이 일견 일리가 있는 점이라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왜구의 한반도 약탈의 행태는 여름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도 유난히 여름에 한반도 남부 국가에 사신을 파견한다든지 교섭이 활발한 점도 이를 뒷바침하고 있다. 반면에 이들 사신이 왜국으로 돌아오는 절기는 대개 겨울이다. 즉 계절풍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인력과 식량을 약취한 뒤, 겨울에 훈풍을 타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근거를 들어 왕건군은 병신년 광개토대왕의 백제 친정 때, 백제를 침략해 약취를 일삼던 북큐슈 기반의 해적은 고구려군과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즉 고구려군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이미 밀고 내려왔을 때는 이미 절기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고, 왜군이 이미 철수하였기 때문에 병신년 백제 정벌에서 그 면모가 일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실성 마립간]] 시절, 왜인들이 대마도를 전진기지 삼아서 봄에 준비하고 있다가 여름에 신라를 약탈하려고 하자, 신라왕이 직접 대마도 원정을 계획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릉비의 신묘년 원문이 정말 이러한 사실을 반영했다고 하면, 왜구가 침몰한 시기는 391년의 여름일 개연성이 매우 크다. 광개토대왕은 신묘년 5월에 즉위했고, 7월에 백제 원정에 나섰으며 10월까지 한강 하류 일대를 수군으로 공격하여 인천-강화도 등지를 점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논리를 적용해 본다면 왜구는 그 해 여름에 약탈을 했고, 이에 고구려가 대응하기 위해 가을부터 백제 원정에 임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물론 신묘년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쳤다는 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신묘년은 광개토왕의 즉위 원년으로, 즉위 원년부터 당면한 고구려의 외교적/군사적 어려움을 부각시키고, 이것을 해결해 나간 영웅을 위한 헌사라는 해석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설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임나일본부설)] 그러나 그의 논리에도 맹점이 많은데, 왜와 4세기 후반부터 돈독한 우위를 쌓으며 국교를 다진 백제를 왜가 침략할 하등의 이유도 없으며, 이는 고구려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대에 고구려가 백제와 왜가 긴밀히 결탁하는 모습을 '화통'이라는 단어 등으로 기록 했기 때문이다. 릉비의 원문에는 396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이미 굴복 시키고 대왕이 아신왕에게, 다신 왜구와 화통하지 말라는 약조를 받아냄을 봐서는, 이미 고구려도 원정을 감행하기 이전부터 백제와 왜의 관계가 협력하는 관계이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이것이 병신년에 고구려가 백제 원정을 하게 되는 명분이거나, 혹은 전쟁 명분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반도 남부를 약탈의 목적으로 침략했다면 백제가 아닌 대마도와 가까운 신라를 공격했을 것이며, 선술했듯이 릉비의 병신년에 왜의 면모가 일절 보이지 않는데도 신묘년 전치문에 굳이 왜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냐는데에 있다. 고대에서 전쟁의 명분과 구실은 매우 중요한데, 이런 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명분을 릉비에 엉성하게 새겼을 리가 있겠느냐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왜가 신묘년에 백제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했다. 근데 정작 원정에 나선 것은 6년 후인 396년이다. 이 때까지 고구려가 왜의 세력이 백제를 통치하고 있었다고 착각할 수 있었을까? 혹은 그것을 고구려가 정세에 아둔한 자국의 백성들에게 "우리 고구려는 의로운 나라다. 우리 이웃인 백제를 괴롭히는 왜구를 내몰고 다시 고구려 중심의 질서를 백제에 확립했다"며 합리적인 전쟁의 명분이라고 내세웠을까? 만약에 다른 사서에 391~396년까지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교류하지 않았거나 전쟁을 치루지 않았다면 납득할 수 있지만, 릉비에 써져있는 신묘년, 즉 광개토대왕의 원년에 고구려는 백제와 한강 하류 일대에서 전투까지 한다. 게다가 신라의 고구려 종속화는 391년 훨씬 이전[*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조금씩 다르지만, 백제 근초고왕이 죽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결탁은 균열이 났고, 370년 즈음에는 신라 사신 위두가 고구려와 함께 전진에 조공 하러 가는 시기에는 신라의 고구려 종속화가 심화 되었을 것으로 본다.]에 있었던 일로 파악되는 상황에서 왜가 391년 신라를 신민화 했고 그것을 고구려 질서로 다시 되돌리기 위해 나선 것은 400년이다. 그래서 결론은 왕건군의 해석도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히 반박하는 주장이지만, 그의 해석에 대해서 한국 여론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 하였고, 이로 인해서 문제가 더 부각된 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 특히 릉비의 문장이 개찬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학자이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이나 재야학계에서 반발심을 샀다. 물론 100퍼센트 그의 학설이 맞다는 것은 아니다. 선술되었듯이 신묘년조가 왜를 주체로 해석하고 병신년 백제 정벌의 전치문이라고 본다면, 왜의 면모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긴 하지만, 왕건군의 전치문 해석은 신묘년 주체에 대한 문제와는 별개로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전치문에 비해 많은 한국 학자들에 의해 인용되었고, 지지를 얻고 있다. 앞서 언급되었던 396년 399년 400년의 왜구의 침입 기사 말고도 404년의 왜구의 대방군 침입 기사도 한일 학계에서는 뜨거운 감자다. 선술되었던 왜왕의 지칭한 "백제, 신라, 임나..."의 도독 관직을 두고, 이것과 연계해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은데, 404년의 기사에는 분명히 백제와 가야의 세력이 등장하지 않고, 왜군의 단독행동을 벌여 황해도 일대까지 들어와, 전횡을 부렸던 것 같이 묘사하기 때문이다. 대방군까지 깊숙히 들어오려면 백제나 가야의 영토를 지나야 하는데, 그들의 면모가 드러나지 않고, 주도세력은 왜구처럼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역사적 사실여부로 접근할 때는 호태왕비를 세울 당시에는 신라는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영락 1년인 신묘년의 시점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한 일이 없었다. 이는 단순히 《[[삼국사기]]》 등을 통한 해석이 아니고, 『광개토대왕릉비』 자체의 영략 10년 경자년조에서도 "지금껏 신라 매금은 스스로 와서[* 다만 스스로 와서 즉, 입조해서 조공하지 않았다는 거지, 조공을 아예 안 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억측이다.]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고 서술했다. 조공의 기록은 없지만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 기록상 1년 차이[* 현재로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가 아니라 삼국사기 쪽이 1년 오기 했다는게 중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광개토왕 치세기에만 국한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이유는 백제의 소실된 역사책인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도 삼국사기에서 기록된 백제 측 기록은 상호 교차검증되며 기년이 같기 때문이다.]이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료를 찾아보면, 신라본기의 기사 [* 392년 1월 기사]로 신라가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401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402년에 왕위를 이어받은 [[실성 마립간]]이다. 정치적 입지도 변변치 않았고 직계도 아니었던 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구려가 친고구려파의 수장 격인 실성마립간을 후원했으리라는 의견이 대세다.]을 볼모로 보내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의 즉위 이전의 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같은 해 5월에 즉위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를 두고 속민이라고 칭했을 수도 있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245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측에서는 [[석우로]]를 내세워 방어했으나 패배한 기록도 나온다. 고로 고구려가 신라를 신묘년 이전부터 강하게 몰아친건 맞는다. 또한 백제의 근초고왕이 신라에게 말 두 필을 선물하며 우호를 싹트던 신라 백제의 관계도 근초고왕의 사망 전후부터 고국양왕 시절 신라가 인질을 보내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삼국간의 역학관계에 대변혁이 있었다. [[근초고왕]] 사망 직후와 광개토대왕 즉위 직전까지 신라는 백제와 결탁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이제는 고구려와 결속하는 모습이 나타는데, 그 근거는 377년과 382년의 신라 사신의 전진 황실 입조가 있다. 이는 고구려 사신과 같이 동행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덧붙여 흥미로운 점은 신라와 백제가 우호를 쌓고(366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말 두 필을 신라에게 선물을 보내며(368년) 친선을 도모하기 전후에는 삼국사기에는 왜국이 침입했다는 기록이 없다. 다시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때는 고구려와 결속이 강해진[* [[고국양왕]] 치세기로 볼 수도 있다. 고국양왕이 죽기 직전에 신라는 고구려에 인질을 보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 즉위 직후이다. 하마다 고사쿠는 이를 두고 백제가 배후에서 왜국을 포섭하여 고구려와 결탁한 신라를 괴롭히라고 사주하지 않았는가 추정했다.[[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04k.pdf|#]] 본론으로 돌아와서, 혹자들은 '신민'은 '속민'보다 오히려 예속의 정도가 약하기 때문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말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혹은 이런 점 때문에 아예 신묘년조의 서술 전체가 역사적 사실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1974년에 일본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가 제기한 주장). 그러나 광개토대왕비석의 원문을 보면 속민이라는 단어가 한 번 더 등장하지만. [* 410년 기사 :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용례를 따져보면 단순히 조공을 수취하는 꽤 느슨한 관계로 정의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96년이나 399년의 기사를 보면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내물 마립간|내물왕]]이 고구려의 노객을 자칭했다. 아신왕은 스스로 무릎 꿇고 알현하며 자신의 동생을 인질로 보냈고, 내물왕은 나중에 직접 광개토대왕을 알현했거나 왕자 복호를 시켜 알현하며 조공을 바쳤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 학계에서는 내물왕이 직접 알현하며 조공을 바쳤다고 해석하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나중에 고구려로 인질로 파견되는 복호를 시켜 알현하며 조공했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신묘년에 등장하는 속민의 관계보다는 앞서 언급한 396년이나 399년 기사가 예속성이 더 강하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즉, 하마다 고사쿠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셈이다. 이를 두고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는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만든 왜를 공격하지 않고 왜 396년 병신년조에 애꿎은 백제를 공격하냐고 논문에서 반문한 적이 있다. 고대 전쟁에서 아주 중요하게 구실하는 명분(백제와의 전쟁)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청동거울과 신묘년이라고 적힌 기록을 두고, 토론회에 참석한 조법종 교수도 왜국 주체설에 회의감을 드러내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83056|언론보도]] 고로 한국 주류사학계에서도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왜국 주체설에 의구심이 있음은 확실하다. 다만 확실히 논박할 만한 근거가 아직 빈약하기에 아직 조사나 연구가 진행되거나 확실한 근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개찬설을 주장했다가 이미 일부 보기 좋게 논파당했으니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한국 학계의 태도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 학계가 광개토대왕릉비에 관심을 둔 지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전쟁의 풍파와 급속한 변혁기 등을 거치면서 전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를 조사한 지 100년이 넘었으니, 지금까지는 수세에 몰렸던 게 당연하다. 한국 학계가 광개토왕릉비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지는 길어봤자 3~40년 정도이다.] 일본서기에서 이런 일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를 두고 이런 학설이 있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각 지방 호족이나 혼재하던 나라들의 구승을 일본이 통일을 이룩한 뒤 집대성하고, 이것을 마치 통일된 왕조에서 있었던 일인 양 소급적용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왜군이 실제로는 통일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이 소규모 국가들에서 파견한 용병 내지는 해적이었기 때문에 기록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대에 문자가 없던 일본은 구전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니 중간에 누락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간혹 일본인들 중에 중국인 학자 왕건군도 일본의 학설에 동조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왕건군은 광개토대왕릉비가 개찬되지 않았고 일본 학계의 판독을 지지할 뿐,[* 물론 근래에 들어와서는 한국 사학자들도 능비의 글은 개찬되지 않았다고 여기고 일본의 판독과 같이하지만, 해석이 다른 것뿐이다. 한자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함축된 의미가 많으므로 당연히 판독이 같아도 해석은 가지각색이다.] 일본의 해석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왕건군도 상기한 점에 주목했는지, 당시 한반도 남부에서 전횡을 일삼은 것처럼 묘사되는 왜구의 존재를 북큐슈 일대에 본거지를 둔 해적 수준이라고 말했다. 즉 정규군도 아니고 지방 호족이나 국가의 군대나 해적 수준으로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거나 경영할 만한 능력이 있는 주체로 본 사실이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과 배치되는 이론이다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는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가야와 백제 왜군의 무기 수준이나 착용 갑옷 수준에 대해 심도있게 서술했다 >백제나 가야에 비하여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대에 소급할 수 있는 금촉제마구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으며, 5세기가 되어서야 가야로부터 개별적으로 수용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일본 고분시대의 마구에 대한 연구로서 小野山節는 일찍이 편년 작업을 하여, "오로지 수입품에 의존한 시기"를 설정하고 발걸이 형태의 차이를 가지고 제1기를 구식과 신식으로 나누어 보았다. 이에 대하여 中村潤子는 5세기 전반의 제1차 도입기 (구식)에 전해진 한반도 낙동강 하류욕 마구는 결국 일본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끝났으며 5세기 후반의 2차 도입기 (신식)에 검릉형 또는 편원검미형 말띠드리개와 f자형 재갈멈추개로 표상되는 川脥 玉田 계통의 마구가 들어와 그것이 비로소 일본에서 계승, 발전되었다고 하였다. 즉 일본에 4세기대의 기마 문화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중략) > >또한 왜는 4세기대에 단검, 단도,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 등의 무기를 주로 사용하고 5세기에 와서야 공격구(攻擊具)의 주류로서 장검을 채택할 정도였다.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은 어느 정도의 갑옷과 방패만 있으면 치명상을 입힐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러므로 왜의 무장은 일부 射兵이 부가되어 있으나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短兵器가 주력이고, 실전적인 무기로서보다는 과시적인 威信財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인다. >---- >출처: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1분과, "4세기의 한일관계사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왜군 문제를 중심으로 -", 김태식, 40-41쪽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당시에 고구려의 무장체계는 쇠투겁창 중심의 重裝騎兵과 步兵이 조화를 이루는 단계에서 밀집대형 騎兵隊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것이었다. 가야의 무장체계는 살상력이 극대화된 단면 마름모꼴 쇠투겁창과 長頸式 쇠화살촉으로 개량되어 있었고,防護具도 이에 대응하여 철제 종장판 釘結 판갑옷으로 전환되었으며, 목심철판피 발걸이와 하트 모양 말띠드리개도 보유하여 중장 기마전술의 구사가 가능한 수준의 것이었다. > >반면에 왜의 무장체계는 단검, 단도, 두께가 얇은 양날창[鈹]과 쇠화살촉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양날창과 쇠화살촉은 어느 정도의 갑옷과 방패만 있으면 치명상을 입힐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서, 실전적인 무기로서보다는 과시적인 위세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또한 4세기 후반에 일부 나타나는 일본열도의 수신판 혁철 판갑옷(竪矧板革綴短甲)과 방형판 혁철 판갑옷(方形板革綴短甲)은 한반도 남부의 종장판 정결 판갑옷(縱長板釘結板甲)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나, 가야의 판갑옷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여 전체 구조나 제작 기법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미숙한 것이었다. > >그 결과 가야를 매개로 하여 동원된 왜군들은 위와 같은 무장 수준의 차이로 인하여 한반도 내에서 독자적인 행위를 하기 보다는 가야군대의 하급단위로 편제되어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야의 의도에 따라 對新羅 戰線에 투입되기도 하고 백제와 가야의 교섭에 따라 고구려와의 전쟁에 투입되기도 하였으니, 실상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倭賊’ 또는 ‘倭寇’는, 가야군을 주력으로 삼고 있으면서 왜의 원군이 일부 가세된 가야-왜 연합군이었다. >---- >출처: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1분과, 고대왕권의 성장과 한일관계 -임나문제를 포함하여.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왜군의 성격", 김태식, 151~152쪽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그의 견해는 왜국의 부대는 단언코 주력부대가 아니고 소규모 부대로 가야군에 편입되어 용병으로 참가했으나, 복색이 백제나 신라, 가야와는 이질적으로 다르고 인종 구성도 다른 왜군 부대를 고구려가 크게 과장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임나일본부설을 믿는 일부 역사학자들은 "광개토대왕이 5만 명의 군대를 보내어 싸웠을 만큼, 왜국이 강력했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런 주장대로라면 1991년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를 공격하기 위해 미국은 영국, 프랑스,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터키, 이스라엘 같은 44개 나라들과 함께 다국적군을 결성하였으니 이라크는 미국을 포함한 44개의 나라들이 연합해서 싸워야 했을 만큼 초강대국이었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 걸프 전쟁 이전에 벌어진 8년 동안의 [[이란 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이미 이라크는 경제적으로 파탄이 난 상태였고, 도저히 미군한테 저항할 수 있는 수준이 못 되었다.] 미국이 일부러 다국적군을 결성해서 이라크를 공격한 이유는 이라크가 미국보다 훨씬 강력한 나라여서가 아니라, 압도적인 병력을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로마 제국]]이 [[다키아]]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무려 20만 명이라는 대군을 동원한 이유도 다키아 왕국이 로마 제국과 대등한 수준의 강대국이어서가 아니라[* 로마가 이렇게 전력을 다해 공격하자 다키아 왕국은 6년 만에 완전히 멸망해 버렸다. 사실 다키아 왕국은 부족 국가 수준이지, 결코 로마와 견줄 수 있는 강대국이 아니었다.], 걸프 전쟁 당시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병력을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면에서,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로 5만 명의 군대를 보낸 이유도 걸프 전쟁 당시의 미국이나 다키아 전쟁 당시의 로마와 같은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신라를 침략해 온 왜국의 규모는 보통 천명 즈음이며, 이 마저도 훨씬 후대의 5세기 후반의 일임을 보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