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릉비 (문단 편집) ==== 과장 또는 윤색이다 ==== 광개토왕릉비에 쓰인 연도는 삼국사기의 연도보다 1년 빠르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이 392년(임진)에 즉위했다고 서술했는데, 능비에는 영락 원년이 신묘년(391)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두고 삼국사기가 잘못 기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고구려의 역법이 오늘날과는 달라서 광개토왕이 즉위한 392년을 임진년이 아니라 신묘년이라고 생각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근래에는 릉비와 삼국사기의 1년 격절 문제는 선술했듯이 삼국사기의 오차라는게 중론이며, 삼국사기 392년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서 서술한 같은 사건인 관미성 함락 기사는 실제로는 391년에 일어났던 사건이라는게 지지를 얻고 있다.[*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동일 사건은, 고구려본기의 기록이 더 상세하므로, 고구려 측 전승을 기록했고, 백제본기에서 상호 교차 검증 가능하도록 기사를 수록 했을 가능성이 크다.] >'''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髙句麗王談德帥兵四萬, 來攻北鄙䧟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徳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392년|8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 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 >《[[삼국사기]]》 제25권 백제본기 제3 [[진사왕]] 그런데 그 어디에도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392년에는 광개토왕의 백제 원정과 진사왕의 사망, 아신왕의 즉위밖에 기록되지 않았다.[* 물론 [[일본서기]]에는 '일본서기'답게 백제를 능욕하듯이 쓰여있는데 왜의 응신천황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아화왕)을 왕위에 앉히고 직지왕의 누이 등 백제 여자들을 조공하게 한 것으로 쓰여 있으나 이는 사실을 과장·윤색한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가 수군으로 백제를 공격한 내용이 있어서, 신묘년의 도해파(渡海破) 주체는 고구려라는 근거로 사용될수 있는 기사가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하여 1973년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새로운 설을 주장했다.[[http://weekly.hankooki.com/lpage/culture/200512/wk2005121318413537140.htm|#]]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구절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고구려가 백제 침공을 위한 명분용으로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소위 신묘년 기사의 바로 다음에 고구려가 백제[殘國]를 치는 내용이 이어지고, 그 뒤에도 영락 9년에 신라가 왜의 침략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해 이듬해 고구려가 왜를 무너뜨리는[潰] 내용, 영락 14년에 왜가 [[황해도|대방(帶方)]]의 경계를 침범해 물리치는 내용 등이 있다. 일본이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깨뜨렸다는 것은, 고구려가 백제나 왜를 물리치기 전의 상황에 대한 설명, 다시 말해 고구려에 유리한 기사를 싣기 위함이었다는 추측이다. 적대세력의 주체인 백제의 격을 의도적으로 깎을 요량으로 왜를 높인 셈이다. 다만 신묘년조를 그대로 해석하면 왜는 신묘년에 와서 신라는 물론 백제까지 속민으로 삼았다는 것인데, 바로 다음 기사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다는 점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기존의 학설들은 비문의 기록이 모두 액면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서 논쟁을 벌였는데, 잘 생각해 보면 비문의 기록이 전부 사실이라는 보장이 없다. 광개토왕릉비는 선왕의 업적을 찬양할 목적으로 세운 석비이므로, 선왕이 한 일을 합리화하거나 찬양하기 위해 과장 또는 날조를 섞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사실 이는 교차검증이 불가능한 모든 사료들의 함정이기도 하다.] 잘 생각해 보자.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신민으로 삼은 주체가 정말로 왜국이라면, 왜 애꿎은 백제를 공격해 굴복시키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구려는 백제가 아니라 왜국을 타겟으로 삼아야 對백제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고 예전처럼 고구려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이것은 기존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면서도 한국 학자들이 주장했던 비문 변조설도 인정치 않는 새로운 시각이다. 종래의 여러 설이 내포하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으므로 오늘날에는 이 주장이 크게 설득력을 얻었다. 관련하여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논문이라면 일본의 [[자이니치]] 역사학자이자 [[와세다대학]]의 교수인 [[이성시]](李成市)의 논문 '표상으로서의 광개토왕비문'일 것이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 바로 앞 기사를 보면, 백제와 신라는 과거에 고구려에 조공해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오히려 백제에게 신나게 털렸으면 털렸지, 고구려가 우위에 입던 입장이 아니었다.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 중 전사한 사실을 상기해보자.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 신묘년까지 혹은 백 번 양보해서 그 직전까지 고구려가 백제를 지배하고 조공을 받았다고 볼 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다. 당장 광개토대왕의 부왕인 고국양왕대의 기록을 보면, 백제에게 신나게 털리는 모습이 나온다. 즉 백제를 침공한 이유는 명분 쌓기용 거짓말과 과장이라는 게 중론이다. 선술한 백제의 경우에는 현전하는 사료로 백제를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해석할 여지가 없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직전의 391년에 신라가 인질을 고구려에게 파견했는데 이를 두고 속국이라고 칭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고구려와 신라의 밀착은 377년과 382년에 정황상 드러나는데, 북조의 전진에 고구려의 사신과 함께 신라의 사신이 입조한 것이다. 그리고 조공 기록이 없다고 문제가 될 만한 소지도 없다. 삼국사기 특성상 조공을 공(貢}[* 보통 삼국사기에서는 貢과 조공을 혼용하는 편이다 ]이라고만 표현했는데, 368년 신라본기를 보면 당시 최강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의 근초고왕 시절 백제가 오히려 신라에게 貢을 한다고 썼다.[* 十三年, 春, 百濟遣使, 進良馬二匹. 백제왕이 좋은 말을 바치다(貢하다).] 즉 당대에는 貢이라고 해봤자 친선용으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순전히 일본서기의 내용을 따르자면, 근초고왕 시절 백제 장군 [[목라근자]]가 신라군을 격파하고 가야를 점령 했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조공 기록이 없다고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의 기록을 온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신라 왕이 스스로 노객이라고 칭하며 고구려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누가 봐도 복속 관계임을 알 수 있는 영락 10년에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하였다고 말하는데, 정작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친 기록이 전무하다. 따라서 기사가 누락되었다고 해도 이상하다고 느낄 필요가 하등의 이유가 없긴 하다. 또 2019년 [[충주 고구려비]]의 레이더 판독 결과 397년에 건립되었다고 추정한다. 당초에 장수왕 때 세워졌다고 파악한 학계의 주류 학설을 전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즉, 신라는 능비에서 기록하는 399년 신라 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을 청하는 이 시점 훨씬 이전부터 고구려의 속국이었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고구려의 신라 종속화는 따라서 신묘년이나 그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아직 연구 중인 단계로 397년 건립설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광개토대왕비에는 경술 20년, 동부여가 고구려 추모왕의 속민이었고 동부여를 침공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또한 프로파간다용으로 거짓을 보태었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갓 건국하여 나라의 기틀과 토대를 닦는 데 바쁠 고구려가 이미 나라의 기틀을 잡고 운영해가던 동부여를 침공할 힘은 없다. 사료의 양이 부족하므로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학계의 중론은 동부여는 3세기 즈음에 모용족의 침입에 의해 함경도 일대의 북옥저 지역으로 도망간 부여의 일족들이 세운 나라라는 설이 지지를 얻고 있다. 즉, 고로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할 시기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의 이름을 가져와 기록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관념을 통해 당대 혹은 그 시기와 근접한 5세기 광개토왕릉비의 금석문의 내용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태로 비판받는다. 동부여가 추모왕 시절부터 속국이었다는 기사는 과장이나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부족한 사료와 기록을 토대로 동부여는 당대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고, 이것을 후대에 소급적용해서 마치 있었던 나라라고 꾸며낸 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학계가 이미 정설을 새운 바 있다. 위에 나온 북부여 건국설은 정설이며, 광개토대왕릉비의 동부여 기사는 삼국사기 동명왕의 북옥저 정복 기사랑 맞아 떨어진다. 우선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명왕은 북옥저를 정복하였다고 기록되었어있다. 삼국사기의 북옥저 정복 기사도 고구려 자체 전승의 기사로 보이는 이상[* 왜냐면 김부식은 대체로 고구려 자체 기록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 한정이지만 ]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동부여가 추모왕 시절부터 복속되었다고 기록한 것은 '북옥저 지역'이 추모왕시절부터 복속되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며, 285년 이 지역으로 유입된 부여인들이 북부여 중앙정부와의 길이 끊기자 토착민들와 세운 것이 동부여라는 것이 통설이다. 동부여가 북옥저 지방에 있었다는걸 고려하면 딱 들어맞는다. 본론으로 돌아와, 동부여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추모왕 시절의 고구려는 다른 신생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고을에서 시작 되었다. 그런 당대에 건국된 나라가 추모왕이 권력 다툼에서 밀려 도망와서, 곧바로 자신의 출신지를 속민으로 삼았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또 몇 십년 후에는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의 [[유리명왕|유리왕]]에게 자신들에게 복속하라며 협박을 하자, 유리왕은 복속 하겠다고 회답을 한 적도 있다. 동부여 = 부여로 상정한다면 3세기에 기록된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부여의 인구는 8만 호이며, 고구려의 인구는 3만 호로 건국 후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국력 차이가 났다.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삼국유사에 의히면 [[대무신왕]] 치세기에 이르러서야, 고구려가 부여와의 전쟁에서 대소왕을 죽이는 등 고구려와 부여의 국력이 대등해졌다는 점이다. 대소왕이 전사하자 부여는 망하게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삼국사기에서 부여를 정벌하는 기사에는 상당히 괴기스러운 설화가 많이 차용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이르면, 부여는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멸망하지 않았으므로 삼국유사와 충돌하며, 부여와 고구려 두 나라 모두 출혈이 상당한 전쟁을 치뤘고, 동부여는 전쟁 중에 [[대소왕]]이 전사하고 변혁기를 거치게 된다. 두 사서가 서로 충돌하지만, 부합하는 면에서는 고구려의 대무신왕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여 혹은 동부여로 일컬어지는 나라와 동등한 국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윤색은 당대에 흔했는데, 당장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불을 짚힌 온조왕의 마한 복속 기사를 봐도 알수 있다.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 하자마자 마한을 복속 시켰다고 믿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사실은 근초고왕 시기에 일어났던 일을 소급시켜 적용한 문헌을 삼국사기다 인용 했다는 설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을 빗대어 360년을 소급시킨 이 기사를 육주갑인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마한의 복속 시기에 대한 현재 학계의 중론은 근초고왕 시기가 아닌 훨씬 후대인 6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방후원분의 영향이다. 다만, 그 시대 고구려 사람들의 인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동으로는 동부여[* 혹은 신라라는 견해도 있다. 중원 고구려비에서 도출된 당대의 고구려인들의 인식에서 신라는 그들의 東夷(동이), 즉 동쪽의 오랑캐였다.], 북으로는 숙신, 서쪽으로는 패려, 남쪽으로는 백제가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칭하며 그들을 교화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표현해준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고구려의 자의적 해석에 기반한 윤색(동부여를 추모왕 이래로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원문에서 도출되는 이들 다섯 나라들의 공통점은 원래 고구려의 속국이었는데, 고구려의 질서에 이탈해서 정벌의 대상이 되거나, 원래는 속국이 아니었으나 속국이 되었다는데 있다. [* 다만 패려는 이전에 조공을 바쳐왔다 혹은 이전부터 고구려에 복속해왔다라는 식의 서술은 없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광개토대왕비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광개토대왕을 미화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선전)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물이다. 쉽게 말하자면 비문에 적혀 있다고 해서 그 내용을 곧이 곧대로 100%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고대 이집트]]의 국왕인 [[람세스 2세]]는 아부심벨 신전에다가 자신이 [[카데시 전투]]에서 신으로 변신해 혼자서 [[히타이트]] 군대를 쳐부수고 승리했다고 기록을 했으나, 히타이트측의 기록들까지 교차 검증한 결과에 의하면 카데시 전투 이후에도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의 아무루는 오히려 히타이트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이집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중동의 동쪽으로 세력을 뻗는 일이 불가능해졌으며 전략적으로는 히타이트의 승리에 가깝다고 결론이 났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전공을 과장하기 위해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 왜곡 선전을 한 것이다.[* 하지만 람세스 2세가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상에 어느 왕이 백성들한테 자기가 전쟁터에서 패배했다고 요란하게 떠들고 다니겠는가? 심지어 람세스 2세로부터 먼 훗날의 이집트 국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 7세]]도 자신이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고 도망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민심이 흔들릴까봐 [[악티움 해전]]에서 마치 이기고 돌아온 것처럼 요란하게 거짓으로 [[개선식]]을 벌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광개토대왕비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과 싸워 전사시켰다고 기록했으나,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고국원왕이 근초고왕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 중의 하나가 어느 사건으로부터 가까운 기록일수록 신빙성이 크고 반대로 먼 기록일수록 신빙성이 적다는 것인데, 당장 광개토대왕비문과 삼국사기에서 고국원왕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 지를 본다면 그러한 법칙이 반드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고국원왕의 죽음으로부터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고국원왕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데, 고국원왕의 죽음으로부터 먼 시기에 만들어진 삼국사기에서는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에게 패배해 죽었다고 사실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광개토대왕비에서 백제가 오래 전부터 고구려의 속민이라고 적었는데, 그런 속민인 백제한테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죽었다고 사실대로 적으면 고구려 왕가의 신성함이 부정되며 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라는 주장에 큰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배경을 모르고서 삼국사기를 보지 않은 채, 광개토대왕비문만 본다면 백제가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어버리기 쉽다. 그런 이유에서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고구려의 주적을 백제가 아니라 왜국에 촛점을 맞추는 이유도 실제로 왜국이 고구려와 동등한 입장의 강대국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인식한 백제가 광개토대왕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다는 점을 그대로 적는다면 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주장에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했던 진짜 이유는 그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죽임을 당한 일에 대한 복수이면서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해 왕을 죽일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적수인 백제를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헌데 이런 목적을 광개토대왕비문에 그대로 적었다가는 자칫 하늘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고구려 왕실의 위신을 실추시킬 우려가 있었고[*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고구려 왕실은 하늘의 후손이니 곧 신에 가까운 존재인데, 그런 신성한 존재인 고구려의 왕이 속민이라는 백제한테 공격당해 죽었다고 인정해 버리면 그건 고구려 왕실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아울러 백제가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선전을 스스로 부정해 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했던 목적이 복수나 예방전쟁이 아니라, 마치 속민인 백제를 바다 건너에 있는 왜국의 침략에서 지켜주려는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미화하고 과장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